[좋은생각 행복편지] 측간은 없다

입력 2013-02-26 07:04:20

종손녀가 발을 동동 굴립니다. 질부가 알았다는 듯이 아래채의 재래식 화장실 위치를 알려줍니다. 옥내 화장실이 있지만 다른 세배 손님이 사용하고 있나 봅니다. 초등학교 5학년인 종손녀가 마루 문을 열고 나서는데 제 할아버지가 말을 붙입니다.

"가음아, 측간에 조심해서 들어가거라."

듣는 둥 마는 둥 바쁘게 화장실을 다녀온 가음이는 겸연쩍은 웃음을 띠면서 "할아버지! 왜 측간이라 하세요?"하고 질문을 내놓습니다. 형님은 손녀의 질문에 머뭇거리더니 "그래, 옛날에는 화장실을 측간이라 했단다"고 일러주지만 가음이는 석연찮아 하는 것 같습니다.

1950년대는 그것을 정랑(淨廊)이나 뒷간 혹은 측간(厠間)이라 하면서 측간 할미 귀신이 산다고들 믿었지요. 생경스럽다 못해 호랑이 담배 피우던 옛날 옛적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내가 중학생이던 60년대에는 변소로 통용되었습니다. 아주 직설적이지요. 학교의 독립 건물인 화장실 외벽에 걸어 둔 검정 글씨의 '변소'라는 나무 명패가 기억이 납니다. 그 이후 우리나라는 개발의 격동기를 맞으면서 주거 문화에도 큰 변화가 왔지요. 실내로 들어선 화장실, 변소라는 말은 아주 촌스럽게 들렸습니다. '화장실'(化粧室)로 대체되면서 그것이 훨씬 세련되고 교양 있는 표현으로 인식되었지요. 한때는 W.C(Water Closet)라고도 했었는데, '특별히 유식한 사람만이 들어가는 워싱턴(W) 칼리지(C)다'라는 우스갯소리도 있었습니다.

속도감 있는 변화와 발전으로 온 세계를 놀라게 한 우리 사회는 화장실의 모습과 이미지도 아주 다르게 변용시켜 놓았습니다. 불결과 불편에서 청결과 안락한 공간으로 바뀐 것은 물론이요 그야말로 옷깃과 얼굴을 살피고 분칠을 고치는 여유 공간이 되고 있지요. 도시나 농촌 어딜 가나 공공화장실은 분명히 그 단순 기능을 넘어 다양한 공간미를 만들어 주고 있습니다.

20세기 초입, 현대미술가 마르셀 뒤샹은 '샘'(泉)이란 작품으로 소변기 한 개를 전시장에 내놓습니다. 뒤샹은 기존 미술의 존재와 형식을 바꾼다는 시도였습니다. 당시의 미술계는 그를 외면하고 비웃었지만 자신의 예술세계를 표현하는데 가장 극단적인 수단으로써 변기를 선택한 것이 아닌가 싶어지기도 합니다.

최근 어느 연예인의 집이 TV에 공개되었는데 화장실을 드레스룸으로 꾸민 것이 화제가 되더군요. 화장실과 세면대 심지어는 욕조 위에 이르기까지 각종 액세서리나 의류를 보관하는 발상의 전환을 보였습니다. 이제 외진 곳으로 멀찍이 밀려졌던 측간이라든가 변소는 찾아보기가 어려워졌습니다. 그 자리에 화장실, 레스트룸(Restroom)이 온전하게 들어앉게 된 것이지요.

얼마 전 윈난성에서 차마고도에 이르는 중국 남서부 지방을 여행하였습니다. 현대화된 도시와 시골지역을 넘나드는 동안 나는 낯설고도 불편했던 화장실을 잊지 못합니다. 공공장소에서 문이 없는 화장실을 사용한다는 것은 여간 고통이 아니었지요. 더군다나 낯선 용변자와 서로 얼굴을 마주 보고 앉기란 고역에 버금가는 고충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뿐이던가요. 복지국가로 알려진 북유럽을 여행하면서도 나는 공공 화장실을 이용할 때마다 적잖은 불편에 마주치곤 하였습니다. 급하게 뛰어갔는데 웬! 화장실 앞을 지키면서 1달러를 요구하고 손을 내미는 안내요원(?) 때문에 난감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나는 낯선 건물 안으로 들어설 때면 가장 먼저 화장실에 들립니다. 중요한 약속이나 강연 때는 더욱 그러합니다. 나의 매무시를 가다듬기 위함도 있지만, 마음의 안정과 여유를 갖기 위해서지요. 그야말로 레스트룸으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 공간이 배려하고 있는 문화적인 수준도 짐작할 수가 있지요. 깨끗함과 아울러 여유로운 공간 위에 미적 손길을 더한 화장실을 만나면 저절로 그 건물 주인에 대한 경애심과 믿음까지도 보태주게 됩니다. 지난겨울에 방문했던 타이베이의 101호 빌딩은 전망대의 화려함과 아울러 갤러리로 꾸며진 화장실의 격조에 보는 이들에게 놀라움을 금치 못하게 하더군요. 공공장소의 화장실은 그 나라의 경제수준뿐만 아니라 정신문화의 반영으로 이어집니다. 외국인들이 우리의 고속도로 휴게소나 백화점의 화장실을 부러워한다는데 멀지 않아 '화장실 한류'가 지구촌을 누비지 않을까 기대합니다.

김정식/담나누미스토리텔링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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