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필귀정] 어쩌자고 그런 말을

입력 2013-02-21 11:28:07

허태열 청와대 비서실장 내정자는 인선 발표 후 웃음을 머금은 얼굴로 모두가 행복한 대한민국을 만들 수 있도록 대통령을 보좌하겠다고 소감을 말했다.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의 국정 모토인 '국민 100% 행복 시대'를 열겠다는 다짐이다. 박 당선인이 대선을 전후해 기회 있을 때마다 강조한 말이 '국민 100% 행복 시대'였으니 대통령 참모로서 충실히 제 역할을 하겠다는 각오일 것이다. 허 내정자뿐만 아니라 내정된 일부 각료와 청와대 참모들도 모든 국민이 행복해질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모든 국민이 행복한 나라'라는 것이 가능하기나 한지 모르겠다. 박 당선인이 대선 과정에서 이 말을 할 때부터 어쩌자고 그런 말을 쉽게 할까 싶었다. 모든 국민이 행복감을 느끼며 살기란 사실상 불가능한데 그렇게까지 약속할 일은 아니라고 여겼다. 대선에서 유권자들의 표를 모으기 위한 구호 정도이겠거니 했다. 약간의 과장 광고나 홍보는 애교로 봐줄 수 있는 것처럼 그렇게 알면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박 당선인은 최근 여러 자리에서 '국민 100% 행복 시대'를 열겠다고 힘주어 말했다. 침착한 표정과 진지한 자세로 그런 말을 할 때는 결의가 느껴지기도 했다. 앞으로도 그럴 것처럼 보인다.

박 당선인과 새 정부가 추구하는 '국민 행복'은 국민 개개인이 저마다 처한 상황 속에서 느끼는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 속에서 지속적으로 느낄 수 있는,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만족감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 아이를 낳고 키우는 데 큰 어려움이 없고 좋은 직장에 취업해 먹고사는 데 지장이 없으면 국민이 행복할 수 있을 것이다. 전쟁과 범죄로부터 안전하다고 느낄 수 있는 삶, 열심히 일할 수 있고 여가가 나면 비용에 신경 쓰지 않고 외식하거나 여행 갈 수 있는 삶, 늙어서도 여생을 편안히 보낼 수 있는 삶도 국민의 행복 조건이 될 것이다.

그러나 현재 우리 국민의 삶은 보편적인 행복과는 너무나 먼 거리에 있다. 국민행복지수가 전 세계 국가 중 하위권에 머물러 있고 자살률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가장 높다. 극심한 경제 양극화로 중산층이 무너져 많은 국민이 힘겨운 삶에 허덕이고 있다. 수백만 비정규직 근로자와 영세 자영업자가 버티듯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으며 젊은이들은 취업하지 못해 절망감을 곱씹고 있다. 아이 키우기가 어렵고 노후도 불안하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걱정을 가득 안고 살아야 해 도대체 행복하다고 느낄 수 없는 삶이다. 그래서 박 당선인과 새 정부의 '국민 100% 행복 시대'는 아득하고 공허하게 들린다. 주워담지 못할 말을 한 건 아닌지 돌아볼 일이다.

박근혜 정부는 21일 일자리 창출과 창조 경제, 국민 맞춤형 복지, 안전과 통합의 사회, 신뢰의 한반도, 문화가 있는 삶 등 5대 국정 목표와 140개 국정 과제를 제시했다. 국민이 행복해질 수 있는 목표와 과제들로 달성하기만 하면 국민이 좀 더 행복에 다가설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대선 때 공약 1순위로 내세웠던 '경제민주화'가 2선으로 밀려 국민이 행복할 수 있는 조건 하나가 후퇴했다. 새 정부의 국정 목표를 다 이룬다 해도 '국민 100% 행복 시대'가 되기 어려운데 애초의 큰 약속마저 접는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제시한 국정 목표를 이행하는 것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국민의 삶을 세심하게 살피는 일이라 할 수 있다. 정책을 기계적으로 추진하기보다 국민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일이 필요하다. 취업난, 주거난, 생계난 등의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고 보듬는 노력을 해야 한다. 투쟁을 벌이는 노동자에 대해 법적 조치를 들먹이기에 앞서 왜 행동에 나서는지를 짚어야 할 것이다. 즉, 국민과 소통하는 일이다. 국민과 소통함으로써 정부에 대한 신뢰를 높인다면 지금은 어렵더라도 희망을 품을 수 있다. 국민 모두를 행복하게 만드는 조건에 치중하는 것보다 소통과 신뢰를 통해 희망을 살려낼 수 있다면 그것이 국민이 행복해지는 길이 될 것이다. 그런 기대를 하고 싶으나 새 정부 각료와 청와대 비서진 인선 과정과 결과는 소통 부족과 대탕평 인사의 약속을 저버려 실망스럽다. '국민 100% 행복 시대'의 모토에 조금이라도 충실하고자 하다면 좀 더 근본적인 문제, '소통'과 '신뢰'를 생각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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