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삼철의 에세이산책] 술집 여자들의 슬픈 노래

입력 2013-02-20 07:33:11

술집 여자들의 슬픈 노래

1960년대 말과 70년대 초는 눈부신 경제 성장을 이루던 때 였다. 경제 발전은 한적한 시골 우리 마을에까지 변화의 바람을 몰고 왔다. 색시 집이 3곳으로까지 불어났던 것이다. 그 색시 집이 하필이면 우리 집 양옆으로 자리를 잡았다. 삼거리마을, 가장 목 좋은 곳에 우리 집이 있었기 때문이다. 막걸릿집도 아닌 색시 집이 양쪽으로 들어섰으니 우리들 교육 환경은 아주 열악할 수밖에 없었다.

맹자 어머니 같았으면 당장 이사를 했겠지만 부모님은 전혀 개의치 않고 방앗간을 계속했다. 일찍이 우리 남매 중에서 맹자 같은 '훌륭한 인물'은 나오지 않을 것임을 간파라도 하셨던 것일까. 하긴 설령 맹모 같은 교육관을 가졌다 하더라도 삶의 터전을 통째로 옮기는 일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먹고사는 일이 절실하던 시절이었으니 말이다. 결과적이지만 우리 오 남매는 모두 나쁜 길로 빠지지 않고 반듯하게 성장했다.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가 있으면 반면교사(反面敎師)란 말도 있는 것이다.

전기가 들어오기 전이라 숙제는 주로 낮에 해두었다. 밤이 되면 양옆에서 들려오는 노랫소리 때문에 도대체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피할 수 없다면 차라리 즐겨라' 했던가. 의도한 건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그렇게 됐다. 소음처럼 들려오던 노랫소리가 귀에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마음속으로, 어떨 때는 들려오는 노래를 따라 부르기도 하고 '자알 넘어간다!'라며, 추임새까지 넣으면서 술꾼들 흉내까지 내기에 이른다. 술집 색시들은 주로 '동백 아가씨'나 '저 강은 알고 있다' 같은 애절한 곡조의 유행가를 많이 불렀다.

노래 잘 부르는 색시가 젓가락 장단에 맞춰 구성지게 뽑아내는 소리는 참으로 듣기 좋았다. 그런데 가만히 듣고 있노라면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이미자의 목소리와는 또 다른 애달픈 분위기가 있었다. 왠지 모를 진한 서러움 같은 것이 배여 있었던 것이다. 어린 내가 괜히 슬퍼져서 눈물이 나올 지경이었다. 그러나 화기애애하던 분위기도 잠깐, 초반에 잘 나가던 술판이 막판에는 꼭 아수라장으로 바뀌었다. 나긋나긋 비단결 같던 목소리는 앙칼진 악다구니로 바뀌고 상냥스럽게 안주를 집어주던 작고 희던 섬섬옥수는 술꾼들의 멱살을 사정없이 잡아당겼다.

술집 여자들은 왜 정해진 코스처럼 매일 노래와 악다구니를 반복했을까. 그네들의 순탄치 못했을 인생행로와 관련이 있을 듯싶다. 술집 색시로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던 기구한 역정을 생각하면 한숨이 절로 나왔을 것이다. 또 시골마을 작부로까지 전락한 처지를 생각하면 화가 치밀어 올랐을 것이다. '한'(恨)을 달래고자 '엘레지'(悲歌)를 불렀고 꼬여버린 삶에 대한 분풀이로 애꿎은 술꾼들의 멱살을 흔들어댔을 것이다. 헐려 없어진 고향 옛집을 떠올리니 아직도 색시들의 슬픈 노랫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다.

삼건물류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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