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나무나 꽃처럼 한자리에서 그대로 뿌리를 내리고 산다면 어땠을까요? 나무처럼 몇백 년 어쩌면 몇천 년 그 자리에 서 있다면 아무리 오래 산다 한들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물론 나무의 삶이 의미가 없다는 건 아니죠. 사람들은 오랜 세월 대신 두 다리가 있어 어디든 갈 수 있다는 자유를 얻었다는 거지요. 그리고 그 자유의 여정이 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얼마 전부터 '길'이라는 테마로 한 방송 구성안을 쓰게 됐는데 주제가 '길'이다 보니 온종일 '길'만 떠올리며 해보는 생각입니다. 인트로(intro)로 쓰게 된 첫 문장에 제가 가진 평소의 생각을 이렇게 담아봤습니다. '길은 늘 그 자리 그대로 있었던 듯 자연스럽습니다. 저리 구불구불 자신의 몸 그대로 누워 있으니 말입니다. 그게 길이고 사람들은 그 길 위에 발을 딛습니다. 그것이 세월이 되고 역사가 되는 것이지요. 길은 가지 않으면 그저 길이지만 사람의 발길이 닿았을 때 역사가 됩니다. 그 위에서 만남이 이루어지고 이야기가 생기고 추억이 만들어집니다. 그게 여행인 거지요.' 이렇게 첫 운을 떼고서 중년남성의 발길을 따라 찾아가보는 다양한 길.
그러다 보니 제가 살고 있는 도시에 대한 길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더군요. 도시의 길은 회색의 콘크리트건물들 사이에 부속된 이동수단으로밖에는 어떤 의미도 없듯이 느껴지니 말이죠. 넓은 아스팔트길로 소음을 내며 빠르게 지나가는 자동차들, 각자의 목적지를 향해 바쁘게 걸어가는 무표정한 사람들. 실제로는 그렇게 삭막하지 않는데도 왜 우리는 도시의 길을 떠올리면 그런 이미지만 생각날까요? 그것 또한 관념에서 비롯된 건데 말이죠.
그래서 관념의 껍질을 한 꺼풀 벗겨 내고 도시가 가진 길의 속살을 들여다보곤 합니다. 대로는 씽씽 달리는 차 때문에 위험하니 그보다 좁지만 한적한 길로 옮겨 걷듯이 말이죠. 그런데 참 뜻밖에도 한적하고 편안하고 때론 고즈넉함으로 일부러 다리쉼을 하고 싶은 곳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지요.
묵직한 아파트 공기가 답답하게 짓누르고 있긴 하지만 문학의 향취를 맡을 수 있는 이상화 고택 골목을 지나, 보기만 해도 마음이 평온해지는 계산성당을 지나, 명나라에서 귀화한 두사충과 이웃집 여인과의 사랑이야기가 솔솔 풍기는 뽕나무길을 지나, 온갖 약재냄새만으로도 몸이 좋아질 거 같은 약령시 골목을 지나, 담쟁이넝쿨이 고풍스러운 옛 제일교회를 지나, 꿀떡, 팥떡 인절미, 송편 한 입에 꿀꺽 먹고 싶은 염매시장 떡집들을 지나, 비 오는 날이면 빈대떡 신사가 비칠거리며 걸어갈 거 같은 진골목을 지나, 마당 깊은 집에 도착할 거 같은 길들이 이 도시에 분명 존재한다는 사실, 참 즐겁지요!
사람이 있고 이야기가 있고 그래서 역사가 깊게 배인 그 길이 도시의 한복판에서 그리움처럼 사람들의 발길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은 도시인들에게는 분명 행복한 일이지요. 다만 그 행복을 찾아가기에는 여유가 조금 부족하지만요. 그래도 마음만 있다면 즐길 수 있는 시간은 충분하지 않을까 싶네요.
도시의 길을 이야기하다 보니 조금 아까운 길이 생각나는군요. 바로 방천시장이지요. 예전에는 서문시장만큼은 아니지만 상당히 큰 시장이었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주변에 대형백화점이 생기면서 점점 쇠락해져 갔다는데요. 언제인가 오래된 사진을 보니 신천이 정비되기 전, 꽤나 성황을 이루던 시장풍경이 있었는데 그곳이 바로 방천시장이라고 하더군요.
몇년 전에는 '전통시장 살리기' 차원에서 문전성시 프로젝트라는 이름으로 시장 활성화에 꽤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여전히 예술인들과 시장상인들의 공존의 공간으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또 김광석 벽화길이 있어 주말이면 그를 여전히 사랑하는 팬들의 발길도 적지 않지요. 하지만 시장을 살리기에는 역부족이어서 방천시장을 자주 찾던 저로서는 안타까움이 늘 남아있습니다. 이런 마음을 지역문화를 고민하는 지인들과 주고받은 적도 꽤 되지요.
그래서인지 방천시장길을 걷다 보면 그 고민들이 어느덧 상상으로 퍼져가서 새로운 거리풍경을 만들어내곤 합니다. 어떤 상점에는 기타가 걸려 있고, 어떤 상점에는 화구들이 진열돼 있고, 어떤 상점은 갤러리를 겸한 화실이 되고, 어떤 상점은 김광석의 캐릭터로 만든 아기자기 기념품들이 가득하고, 작은 소품을 직접 배우고 만들어가기도 하는 목공소도 있고, 거리 좌판에는 직접 만든 수공예품이 즐비하고, 어떤 곳에서는 수제쿠키를 굽고, 어떤 곳에서는 김광석 같은 가수지망생들이 노래를 배우고, 물건창고를 개조해 만든 소극장에서는 김광석뮤지컬을 연습하고…, 그야말로 방천시장이 예술시장, 문화시장(culture fair, culture market)으로 변모하는 상상이지요.
상상이 현실로 이루어진다면 그것이 또 하나의 길이 되고 역사가 되겠지요. 그것이 길이 가지는 내력이기도 하고요.
권미강/경북작가회의 회원
댓글 많은 뉴스
문재인 "정치탄압"…뇌물죄 수사검사 공수처에 고발
이준석, 전장연 성당 시위에 "사회적 약자 프레임 악용한 집단 이기주의"
[전문] 한덕수, 대선 출마 "임기 3년으로 단축…개헌 완료 후 퇴임"
대법, 이재명 '선거법 위반' 파기환송…"골프발언, 허위사실공표"
민주당 "李 유죄 판단 대법관 10명 탄핵하자"…국힘 "이성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