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디시티 대구 의료 100년] 제1부-조선시대 의료 <7> 조선인 김갑수(상)

입력 2013-02-18 09:13:09

지게 가득 볏단을 이고 가는 농부의 모습에서 넉넉함을 엿볼 수 있고, 개울에서 빨래하는 아낙의 모습에서 평온함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조선 민중의 삶이 사진처럼 여유로운 것은 결코 아니었다. 동산의료원 자료 사진.
지게 가득 볏단을 이고 가는 농부의 모습에서 넉넉함을 엿볼 수 있고, 개울에서 빨래하는 아낙의 모습에서 평온함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조선 민중의 삶이 사진처럼 여유로운 것은 결코 아니었다. 동산의료원 자료 사진.

◇1671년 '경신 대기근' 쓰러져간 민초들의 삶 기록 근거 픽션 재구성

'삶의 질'이 화두에 오른 것은 불과 10년 남짓이다. 그나마 보편적 의료가 자리 잡은 지도 겨우 한 세대를 지났을 뿐이다. 먹고사는 문제가 생존을 위협하지 않게 된 지도 반세기밖에 안 된다. 시간이 흐르면서 역사는 윤색되기 마련이다. 기층민의 기록이 아닌 권력자의 서술일수록 더욱 그러하다. 고단하고 팍팍했던 민중의 삶은 역사의 곁가지일 뿐이었다.

의료도 마찬가지다. 형식적인 의료 구호제도와 활발한 저술 활동의 기록은 남아있지만 질병의 고통 속에 신음하며 하루살이처럼 덧없이 사그라진 민중들의 이야기는 거의 남아있지 않다. 앞으로 세 차례 싣게 될 '조선인 김갑수'는 역사의 편린들을 그러모아 만든 픽션이다. 비록 지어낸 이야기지만 조선왕조실록 등 역사서에 단편적으로 남아있는 기록들에 바탕을 두고 있다. 시대적 배경은 조선 현종 재위기간인 1670년(경술년)과 1671년(신해년)에 벌어진 '경신 대기근'(庚辛大飢饉)에 두고 있다. 당시 조선 인구의 20%인 100만 명 이상이 굶어 죽는 대참사 속에 한 줌 재처럼 사라져간 한 가족의 이야기다.

◇제1부-조선시대 의료 조선인 김갑수(상)

흰 쌀밥에 고깃국은 못 먹어도 굶어 죽지는 않을 거라고 했다. 땅이라도 파먹을 기세로 죽으라고 논밭에 머리를 처박고 가쁜 숨을 몰아쉬면 제 자식 끼니 거르는 일은 없을 거라고 했다. 그마저도 하늘이 도운 거라 믿었다.

논밭을 돌보는 시간이 따로 정해진 것은 아니었다. 동녘에 희뿌연 기운이 보이기 전부터 서산으로 해가 꼴딱 넘어가서 바로 건너편 논두렁마저 시커멓게 보일 무렵까지 허리가 끊어질세라 굽히고 펴기를 되풀이해야 했다.

그래도 갑수는 행복했다. 나이 서른다섯에 벌써 앞니가 위아래로 다 빠져서 웃을 때마다 손으로 입을 가리는 얼굴 시커먼 아내가 있어 행복했고, 허구한 날 논밭 일을 함께하면서도 동생까지 애살스레 돌보는 맏딸이 있어 듬직했다. 아래로 서너 살 터울이 나는 두 아들은 집안의 기둥이었고, 해가 바뀌어 다섯 살이 된 막내딸은 그저 바라만 봐도 좋았다.

하루 일을 마치고 나면 온몸이 물먹은 솜처럼 무거워 그저 털썩 주저앉고만 싶었다. 일찌감치 뜬 초승달을 뒤로한 채 곡괭이를 둘러메고 집 마당에 들어서면 아이들은 뭐가 그리 좋다고 제 아비를 둘러싸 한마디씩 건넸다. "힘드시지예?" "아부지, 평상에 앉아보이소. 제가 어깨 주물러 드릴께예." "아니제. 먼저 퍼뜩 씻으이소. 시장하실 텐데."

소박하기 그지없는 저녁 한 끼지만 이렇게 둘러앉아 배를 채울 수 있다는 것은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행복이었다. 고단하고 팍팍한 내일이 기다리고 있지만 그렇게 세월은 흘러 아이들은 커가고, 세상은 돌아갔다.

◆하늘의 기운이 심상찮다

사람들은 뭔가 심상찮게 돌아간다고 했다. 큰 변고가 생겨서 하늘이 노한 것이라고도 했다. 모내기 철에 보름쯤 늦게 비가 오기도 했고, 초가을에 사나흘씩 밤낮없이 비가 퍼붓기도 했지만 늘상 있던 하늘의 조화일 뿐이었다.

하지만 몇 해부터는 날씨가 변덕을 부리는 정도가 아니었다. 온 세상이 꽝꽝 얼어붙어야 할 정월에 열흘 가까이 봄기운이 물씬 풍기더니 춘사월 어느 날 아이 주먹만 한 우박이 떨어져 이웃 마을 한 아이는 머리가 깨져 죽기도 했다.

모내기 철엔 비가 아예 안 와서 세 살배기 손까지 빌려서야 겨우 논물을 댔다. 가까스로 모가 살아붙나 싶었지만 오뉴월 뙤약볕은 고사하고 스산한 찬바람이 온 여름 불어댔다. 이래서야 벼가 익기는커녕 몽땅 말라죽을 판이었다.

평생을 땅강아지처럼 흙 속에서 목숨 줄을 찾는 이들에게 하늘과 땅의 배신은 그저 황망할 따름이었다. 한여름 줄지어 먹이를 옮기던 개미 떼가 철모르는 아이들의 발길질에 짓이겨져 죽어도 이보다는 덜 황당하리라.

하지만, 이것도 한때뿐이라며 위로했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었다. 한 해 부지런히 땅을 파야 식구들 입에 겨우 풀칠하는 마당에 연거푸 흉년이 들면 굶어 죽으라는 말과 다름없었다. 하지만 하늘과 땅은 참혹하리만큼 철저히 배신했다.

어느 해부터인가 걱정은 현실로 다가왔다. 비록 기름진 음식은 동네 잔칫날이나 겨우 구경할 정도였고, 실컷 먹고 배를 두드리는 일은 평생 기억에 남을 만큼 팍팍한 삶이었지만 굶고 굶다가 죽는 일까지는 없던 동네였다. 행여 이웃에 끼닛거리가 떨어져 밥 짓는 연기라도 안 날라치면 보리 한 줌이나 옥수수 서너 개라도 건네는 게 인지상정이었고, 아픈 사람이 있어 하루라도 논밭 일을 못할라치면 마치 제 논밭이라도 되는 양 정성스레 피를 뽑고 밭을 갈아주는 게 당연지사로 여겨졌다.

◆악귀의 패악질이 시작되다

굶주림은 사람을 바꾸었다. 언제부터인지 이젠 기억조차 가물가물해질 만큼 굶고 굶다 보니 제 한 몸 건사하는 것도 힘에 부쳤다. 하루에 한 번쯤 굴뚝에 연기가 피어올랐지만 풍겨오는 냄새는 곡식이 익는 구수한 냄새가 아니라 예전엔 거들떠보지도 않던 들나물과 소나무껍질을 멀건 물에 끓여대는 비릿한 내음이 전부였다. 하나 둘씩 픽픽 쓰러져갔다. 뙤약볕 아래 흙투성이가 된 채 말라죽어 가는 지렁이 같았다. 마지막 사력을 다해 삶의 끈을 부여잡으려 했지만 부질없는 짓이었다.

해괴한 소문이 돌았다. 여귀의 장난질이 이웃 동리에까지 미쳐 역병이 돈다고 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어린아이나 노인네, 심지어 장정들까지 죽어나간다고 했다. 며칠씩 피똥을 싸다가 열에 취해 헛소리를 해대고 급기야 눈이 희멀겋게 뒤집혀 세상을 뜬다고 했다. 옛날 역병이 돌아 숱한 사람이 죽었다는 말을 듣기는 했지만 그저 지나간 얘기로만 치부했었다.

갑수는 마음이 심란했다. '곡기라고는 구경조차 못한 게 벌써 며칠째여. 사람이 하도 허약해진께 병이 나는 것도 당연하제. 귀신은 무신 귀신.' 끼닛거리를 찾아보겠다며 아침나절 집을 나설 때 시름시름 앓던 막내 얼굴이 눈에 밟혔다. 핏기라곤 찾아볼 수 없는 아내의 얼굴도 어른거렸다. 걸음을 서둘렀다. 어른 팔뚝만 한 칡뿌리라도 캤으니 다행이다 싶었다.

마당에 들어섰지만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황급히 방문을 열어젖히며 아이들 이름을 불러댔지만 아무런 답이 없었다. 고함소리를 듣고 옆집 길영이가 고개를 내밀었다. "막내 아프다고 자네 안사람이 아이 둘러업고 의원 찾아갔어. 어여 가봐." 뒷말은 듣는 둥 마는 둥 갑수는 칡뿌리를 부엌에 던져두고 길을 나섰다. 동구 밖으로 달음질치는 동안 갑수는 생각했다. '약값도 없을 터인데, 무슨 수로….' 근동에 유일한 의원은 아랫마을 양반들 모여 사는 곳에 있는 최 의원뿐이었다.

◆의원을 만날 수도 없다

그저 살려달라고 매달려보는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든 이 고비만 넘기면 살길은 있을 터.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서 스멀스멀 치밀어오는 불안한 기운은 억누르기 힘들었다. 아랫마을 초입에도 닿기 전에 저 멀리 어둑어둑한 길에 누군가 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아내와 아이들이었다. 벌써 돌아올 리가 없는데. 큰 애 이름을 부르자 "아이고, 아부지"하며 울음이 터져 나왔다. "우째 됐노? 의원은 만나봤나?" 사색이 된 아내는 고개를 저었다. "막내가 아무래도 이상해요. 몸이 불덩이에요."

깊은 잠에 빠진 듯 축 늘어진 막내를 양팔로 넘겨받는 순간 갑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밤기운이 찬데도 온통 땀으로 범벅이 돼 가늘디가는 숨만 쌕쌕거리고 있었다. "의원은 벌써 며칠 전에 박 참판네 갔다는데…. 의원 얼굴도 못 봤어요." 큰딸이 울먹이며 말을 잊지 못했다. "우째야 좋겠노? 우선 너거는 집에 가 있거라. 내가 의원한테 가볼께."

불안한 마음을 억누르며 갑수는 달음질쳤다. 하루 종일 먹은 것이 없다 보니 박 참판 집에 도착할 무렵엔 노란 신물까지 올라왔다. 커다란 대문을 한참 두드린 뒤에야 참판댁 머슴 하나가 문을 열었다. 의원을 찾는다는 말에 머슴은 위아래를 훑어보며 귀찮다는 듯 대꾸했다. "도련님이 아프셔서 의원은 못 간다네. 병이 나을 때까지 의원을 내보내지 말라는 분부가 내렸어." 갑수는 한사코 매달렸다. 의원 얼굴이라도 봐야 했다. 하지만 머슴은 매몰차게 문을 닫았다. "죽는 놈이 어디 한둘이야."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괜시리 참판댁 심기를 건드렸다가 빌붙어 먹는 땅마저 빼앗기면 그걸로 끝이었다. 팔다리가 후들거렸지만 갑수는 이를 악다물었다. '그려, 칡뿌리라도 달여 맥이면 한고비는 넘길 거여.' 갑수는 다시 죽어라고 내달렸다. 마음만 급할 뿐 다리는 연신 휘청거렸다. 넘어지고 자빠지길 수차례. 막판엔 기다시피 집 마당에 들어섰다.

막내 이름을 불렀다. 설마 늦진 않았을 거라며, 쓸데없는 생각은 하지 말자며, 사람 목숨이 그리 쉽게 끊어지겠느냐며 악다구니를 쓰며 뛰어왔는데. 방안에서 터져 나오는 울음소리에 그만 풀썩 주저앉고 말았다. 이미 늦어버렸다.

김수용기자 ksy@msnet.co.kr

감수=의료사특별위원회

최신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