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화 만나고 3·1만세 함성 들리고…
얼마 전 매일신문에 기고한 건축가 승효상 씨의 글은 두고두고 곱씹어볼 만하다. 그는 터무니라는 말은 '터-무늬'에서 파생된 것이라고 했다. 말 그대로 터에 새겨진 무늬를 뜻한다는 것이다. 터무니없다는 것이 근거 없다는 말이고 보면, 터에 새겨진 무늬를 몽땅 지우고 백지 위에 다시 짓는 재개발 같은 사업은 터무니없는 사업이라고 규정했다.
그렇다면 대구는 터무니 있는 도시인가, 터무니없는 도시인가. 정답부터 말하면 대구는 '확실하게 터무니 있는' 도시이다. 오랜 역사를 거치며 터에 새겨진 무늬가 수없이 많은 역사'문화 도시이기 때문이다. 대구에 내려진 축복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터무니 있는 도시, 대구
5, 6년 전만 해도 대구 도심 골목은 시민들에게 낯설고, 그저 그런 곳이었다. 무심코 지나치는 낡고 볼품없는 골목길에 불과했던 것. 하지만 이는 우리가 그 존재를 제대로 몰랐던 탓이 컸다. 대구 도심은 말 그대로 역사'문화의 보물 창고라 할 수 있다. 수백 년에 걸쳐 형성된 골목마다에 그 시대상이 고스란히 보존돼 있는, 보석과 같은 도시가 바로 대구이다.
도심 골목의 부활은 2007년부터 이어지고 있는 대구 도심 재생 사업의 성과다. 골목 곳곳에 흩어져 있던 소중하고 아름다운 우리 역사'문화 자산에 이야기를 입히고, 공공 미술과 공공 디자인으로 채색한 결과 골목은 대구를 대표하는 브랜드로 탈바꿈했다.
동산 선교사주택~청라언덕~3'1만세운동길~계산성당~이상화'서상돈 고택 등으로 이어지는 근대골목 투어는 도심 한가운데서 근대 문화의 향기를 흠뻑 느낄 수 있는 공간이다. 윤순영 대구 중구청장은 "근대골목을 걷노라면 길과 나무, 건축물에 이르기까지 풍부한 스토리를 만날 수 있다"며 "도심은 대구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유일한 장소"라고 강조했다.
◆대화'이해'소통의 공간
영국 역사가 에드워드 핼릿 카는 "역사는 과거와 현재와의 대화"라고 했다. 그의 말처럼 근대골목에서 사람들은 먼저 과거와 대화할 수 있다. 길게는 100여 년 전, 짧게는 수십여 년 전에 이곳을 수놓았던 서상돈, 이상화, 이인성, 박태준 등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 계산성당과 같은 건축물, 끊어질 듯하면서 계속 이어지는 길, 그리고 온갖 풍상을 간직한 나무들과도 대화를 할 수 있다. 또한 골목투어 해설사는 물론 동행한 가족이나 친구와도 말을 주고받을 수 있다.
대화를 해야 이해가 가능하고 나아가 소통'공감할 수 있는 법. 근대골목을 찾은 이들은 대화를 통해 앞선 세대의 희로애락을 알게 되고, 소통하고 공감하게 된다. 또 신(新)세대-아버지'어머니 세대 간의 대화와 이해, 소통, 공감이 이뤄지는 곳이 근대골목이다. 그리고 근대골목을 통해 새삼 대구에 대한 자부심을 가슴에 새기는 이들도 적지 않다. 이 같은 연유로 찾는 사람이 한 해 5만 명에 이를 정도로 근대골목은 대구를 넘어 대한민국의 명소가 됐다. 골목투어사업단 조지현 센터장은 "단순히 골목을 둘러보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골목에 담긴 역사'문화적 가치도 함께 느낄 수 있고, 살아있는 역사를 배우는 기회를 얻을 수 있는 게 근대골목 인기의 비결"이라고 했다.
◆곳곳에 서린 대구정신
근대골목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곳이다. 세대 간 벽을 허물어뜨리는 공간이기도 하다. 어르신들에게는 아름다움이 묻어나는 향수를 선물하고, 아이들에게는 의미 있는 교육 현장으로의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한류(韓流)에 힘입어 일본'중국 관광객 유치에도 이바지하고 있다.
또 근대골목에서 '대구정신'도 만날 수 있다. 3'1운동 계단과 이상화 고택에서는 항일정신을, 계산성당과 제일교회에서는 세상을 향한 사랑을, 더불어 예술가들의 치열한 예술혼도 조우할 수 있다.
현재보다는 미래가 더욱 기대되는 곳이 대구 도심 골목이다. '1천 개의 골목에 1천 개의 이야기가 숨어 있다'는 말에서 알 수 있듯 골목의 활용'발전 가능성이 무궁무진하기 때문이다. 반월당~바오로샬트르수녀원 가톨릭거리 등 골목 단장이 속속 이뤄지고 있고, 향촌동'서문시장으로의 연결도 모색되고 있다.
천천히 근대골목을 걸으며 이런 생각을 해본다. 대구 사람들이 부초(浮草)처럼 떠도는 도시 유목민이 되지 않게 하는 힘은 바로 근대골목에 있다고. 그리고 미래 세대가 대구를 자랑스러워하고 이 도시를 이끌어갈 용기와 힘을 주는 곳이 근대골목이 아닐까 하고….
이대현기자 sky@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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