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안의 아리랑 이야기] <6> '아랑'의 전설 담은 밀양아리랑

입력 2013-01-24 07:03:41

아랑의 애절한 사연과는 달리…곡 흐름은 씩씩한 분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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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랑의 전설' 간직한 밀양 영남루 아래의 아랑각.

지난해 가을 TV 드라마 '아랑사또전'이 인기리에 방영된 적이 있다. 이 드라마는 원래의 내용보다 지나치게 각색되긴 했지만 갈수록 스토리의 전개가 기발해 드라마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이준기·신민아 등 스타급 배역들도 드라마의 인기에 한몫을 담당했던 이 드라마는 바로 밀양아리랑의 설화를 배경으로 한 것이다.

경남 밀양시 영남루 아래쪽 절벽에는 아랑각(阿娘閣)이 있는데 이곳에는 '아랑의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아랑은 조선 명종 때 밀양부사의 딸로 일찍 모친을 여의고 유모의 품에서 자랐다. 아랑은 자라면서 자태와 인품이 고와 주위 사람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기도 했다. 아랑이 16세가 되던 어느 날, 유모의 권유로 영남루에 달을 구경하러 갔는데 유모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한 관노가 그녀에게 다가와 간곡하게 사랑을 호소했다. 그러나 아랑은 조금도 흐트러진 기색 없이 관노의 무례함을 꾸짖었다. 뜻을 이루지 못하게 된 관노는 연정이 증오로 변해 아랑을 살해하고 시신을 주변 대나무 숲속에 묻어 버렸다.

이 일이 있은 후 밀양에 부임해온 부사들마다 첫날밤에 죽어나가고 마을에는 큰 우환이 돌았다. 이것을 이상하게 여긴 이 지역의 한 대담한 사람이 밀양부사가 되어 첫날밤을 지켰다. 이윽고 밤이 되자 죽은 아랑이 귀신으로 나타나 새로 부임한 부사에게 자신의 억울한 죽음을 낱낱이 고했다. 부사는 다음 날 아랑을 살해한 관노와 이를 방관한 유모를 붙잡아 처벌하고 아랑의 원혼을 달래주었다. 밀양 아리랑은 아랑이 억울하게 죽은 것을 슬퍼해 사람들이 "아랑~ 아랑~"하고 부른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영남루 아래 시신을 묻은 대나무 밭에 아랑의 정절을 기리기 위해 아랑각을 세워 영정을 모셔 놓고, 매년 음력 4월 밀양아리랑축제 때 뽑힌 규수가 제관이 되어 제향을 한다.

1928년 8월에 발간된 잡지 '별건곤'(別乾坤)에서 차상찬은 '밀양의 7대 명물, 구슬픈 밀양 아리랑'에서 "밀양의 아리랑 타령은 특별히 정조가 구슬프고, 남국의 정조가 잘 나타나며, 전국에 유행되다시피 했다"고 소개했다.

그러나 지금의 밀양아리랑은 대표하는 사설이나 음악의 흐름을 봐선 아랑의 죽음과 관련 짓기가 쉽지 않다. "날 좀 보소"로 질러내는 첫 부분의 소리를 비롯해 전체적으로 씩씩하고 활달한 음악의 흐름은 오히려 유희성(遊戱性)이 짙다. 이러한 연유로 밀양아리랑은 일제 때 만주 일대에서 활약했던 광복군에게 군가로 사용되기도 했다. "우리네 부모가 날 찾으시거든 광복군 갔다고 말 전해 주소."

기록상으로 밀양아리랑은 1926년 9월 26일자 '매일신보'의 일축소리반 음반광고에 박춘재 장고, 대구 김금화 창의 '밀양알알타령'(密陽卵卵打令)으로 처음 소개됐다. 밀양아리랑은 지역적으로 동부 민요에 속하지만 동부지역의 메나리조와 경기지역의 창부타령조가 혼합되어 나타난다. 따라서 밀양아리랑은 유희성이 강한 잡가적 성격으로 이 시기에 만들어진 신민요로 구분되며, 음악적으로 '아롱타령'이라 불리는 해주아리랑과 가락이 유사해 해주아리랑에서 파생돼 밀양지방에 정착된 것으로 본다.

유대안<작곡가·음악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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