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의 인물] 일제수탈로 쌀 부족, 안남미 수입한 이용익

입력 2013-01-14 07:34:59

이용익(李容翊)은 함경도에서 1854년 서민 아들로 태어났다. 이재(理財)에 밝았는데 보부상과 금광 투자 등으로 거부가 됐다. 이를 바탕으로 한양에 와 인연 맺은 민영익 천거로 고종의 신임을 받았다. 이재 능력으로 왕실 재산을 관리하는 내장원(內藏院) 최고 책임자인 내장원경(卿)에 발탁돼 왕실의 수입을 늘리고 재정을 책임졌고, 중앙은행 총재와 탁지부 대신 등을 지내며 능력을 발휘했다.

반일의 정치 입장으로 1904년 러일 전쟁 땐 일본에 압송돼 핍박과 회유에 시달렸다. 개화된 일본 문물을 접하면서 민족계몽과 민족역량 키우기에 나섰다. 일본에서 인쇄기를 들여와 인쇄소인 보성사(普成社)를 설치했고 3·1운동 땐 독립선언문을 찍기도 했다. 인재양성을 위해 보성(普成) 소학교와 중학, 보성전문학교(현 고려대 전신)도 세웠다.

특히 일본과의 개항 이후 국내 쌀의 반출로 쌀값 폭등과 쌀 부족이 심각하자 이를 해결하려 베트남 안남미(安南米) 수입에 나섰다. 쌀 수입문제로 출국했다 1903년 오늘 러시아 포함(砲艦)을 타고 귀국했다. 그러나 쌀 수입에 대한 저항으로 후유증도 적잖았다. '수입쌀은 혼을 뺏아간다'거나 '수입쌀을 먹으면 아비 어미도 몰라본다'는 등 유언비어도 나돌았다. 나름 근대 개혁에 일익을 담당했지만 을사늑약 이후 해외에서 구국활동을 하다 1907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생을 마쳤다.

정인열<서울지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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