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세 시대 은퇴의 재발견] <1부>새로운 출발 ③꿈 명함 갖기

입력 2013-01-12 08:00:00

'직책' 사라진 빈칸에 '평생 꿈' 담아 '나'를 알려라

그림 화가 이도현
그림 화가 이도현

"은퇴자들은 마땅한 명함이 없으면 마치 죄나 지은 것처럼 주눅 들어합니다. 하지만 명함이 왜 없습니까. 누구나 갖고 있는 휴대전화, 집 전화, 집 주소를 담아도 그것으로 족하지 않습니까. 문제는 도전할 자세입니다."

명함 갖기 운동을 펼치고 있는 대한은퇴자협회 회장의 말이다. 물론 옳다. 하지만 은퇴자들은 안다. 직함이 적혀 있는 자그마한 종이 한 장이 이 사회에서 자신의 가치를, 존재의 이유를 웅변해주고 있다는 것을. 그것은 일종의 힘이며 '아우라'임을 뼛속으로 알고 있다.

그들에게 명함은 곧 직책이며 자신감이다. 따라서 직책 없는 명함은 명함이 아니며, 명함이 없다는 것은 그 자신이 쓸모없는 사람임을 말해주는 잔혹한 메시지로 받아들인다.

김성미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는 "지위로 아이덴티티를 확인하는 우리 사회에서 명함의 상실은 사회적 자존감의 상실이며 힘의 추락이며 좌절감이다. 이는 곧 자아의 상실로 이어질 수 있다"고 했다. 사회적으로 잘나가던 남성이 퇴직하면서 겪는 좌절감이나 무력감은 자칫 우울증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크다고 덧붙인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서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50대 남성의 우울증이 갈수록 큰 폭으로 증가하고 있다. 2007년 2만6천800명이던 것이 불과 4년 만에 무려 20% 이상 증가한 3만2천565명에 이르렀다.(표)

◆자신의 브랜드를 알려라

문제는 직책이 있어야 명함을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이다.

유장휴 명함코디네이터는 "명함은 어느 직책, 어느 조직에 속해야만 필요한 건 아니다. 내가 어떤 것을 좋아하는 사람인지, 어떤 일을 하고 싶어 하는지를 전달하는 기능도 명함의 역할 중 하나"라며 "이런 점에서 나만의 브랜드를 담은 꿈 명함은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데 기존의 명함 못지않은 도움을 줄 수 있다"고 했다.

더구나 100세 시대에 직책이 있어야 명함을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한다. 생에 대한 태도나 미래의 목표를 담은 '꿈 명함'이 오히려 평생 직함으로 더 유용하다는 설명이다.

꿈 명함은 만들기 쉽다. 가령 명산 100곳을 가고 싶은 꿈을 가지고 있다면 명함에 직책을 쓰는 자리에다 '명산 100곳 도전 중'이라고 써넣으면 된다. 걷기를 목표로 하고 있다면 '하루 만보 000', 사람을 유쾌하게 해주고 싶다면 '유쾌한 활력가 000', 인생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전달하고 싶다면 '터벅터벅 인생나그네 000' 등 식이다.

'지역에서 착한 지구시민으로 살아가기'를 명함 타이틀로 정한 노준식(66) 씨는 " 꿈 명함을 한 번 돌리면 순식간에 모임의 주인공이 돼버린다"고 했다. 어떻게 이런 명함을 만들 생각을 했는지, 왜 이 같은 타이틀을 정했는지, 다른 사람의 반응을 어땠는지를 물어 오는 통에 직책을 적어놓은 명함은 명함도 못 내밀 만큼 인기라고 자랑한다.

꿈 명함은 상대방과의 대화를 쉽게 이끌어내 줄 뿐 아니라 상대방이 오랫동안 자신을 기억해주는 장점도 있다. 또 덤으로 이를 매개로 비슷한 꿈이나 취미를 가지고 있는 사람과의 만남도 쉬워진다.

◆당당하게 내밀어라

서규용 농림수산식품부 장관은 자신의 명함에 'Mr. 귀농귀촌'이라고 적어뒀다. 사석과 공석을 불문하고 기회만 닿으면 "은퇴 후엔 고향인 충북 청주로 내려가 귀농하겠다"는 그에게 이 명함은 일종의 꿈 명함인 셈이다.

꿈 명함은 이처럼 도전 의식을 높일 뿐 아니라 자신과의 약속을 상대방에게 알림으로써 자신을 통제하는 기능과 함께, 다짐을 더욱 확고히 하는 역할도 한다.

이숙희 대구북구시니어클럽 실장은 "액티브 시니어들에게 자신감을 심어주기 위해 명함부터 만들어 주고 있다"며 "이제부터는 직책보다 자신의 꿈을 넣은 개인 브랜드 명함을 제작해 평생직함을 가지게 할 생각이다"고 했다.

꿈 명함을 만들 때에는 명함 뒤편에 자신을 홍보할 경력이나 이력을 많이 적는 것이 좋다. 퇴직 전 이력을 넣어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것은 물론, 다양한 경력을 알림으로써 새로운 직업과의 연결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전직 공기업 간부 출신인 김상민(62) 씨는 "명함을 주고받을 때 상대방에게 '명함이 없어서'라며 멋쩍게 웃을 때나 말로 자신을 설명할 때 너무 초라하게 느껴졌다"며 이제부터라도 메시지를 담은 꿈 명함을 만들어 당당하게 명함을 주고 싶다고 했다.

생각만 바꾸면 직책이나 소속이 없어도 나 자신을 잘 알릴 수 있는 방법이나 도구는 아주 많다. 꿈 명함 하나 들고 새로운 사람을 만날 기회의 바다에 자신 있게 한 번 풍덩 빠져보기를 권한다. 명함은 힘이 아니라 그냥 메시지이기 때문이다.

김순재 객원기자 sjkimforce@naver.com

그림 화가 이도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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