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10월 '2012 포뮬러원(F1) 코리아 그랑프리' 대회가 열린 전남 영암군 F1경기장은 전국에서 몰려 온 자동차 경주 마니아들로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 굉음과 함께 튕겨 나가듯 경기장을 질주하는 자동차들. 그때마다 관중석은 일제히 열광의 도가니로 빠져든다. 이 다이내믹한 자동차 경주 열광 말고도 이곳에는 365일 내내 방문객들을 열광케 하는 것이 또 있다. 바로 세발낙지 호롱구이다. 산업화에 성공한 향토음식이 어떻게 수입산과 경쟁하면서 지역 경제를 효과적으로 견인해 내는지 잘 보여 주는 사례다.
◆포뮬러1보다 더 쎈 세발낙지
예부터 전남 영암과 무안 일원에서 잡힌 세발낙지가 유명한 이유는 낙지를 통째로 먹는 이곳 사람들의 식습관 때문이다. 통으로 산낙지를 먹는 데는 가느다란 세발낙지가 더 먹기 좋기에 그렇다. 이곳 사람들은 통마리 산낙지를 이렇게 먹는다. 꼬무락거리는 세발낙지를 산채로 집어들고서 손으로 그냥 쭉 훑어 내고는 나무젓가락에 낙지 목을 잽싸게 끼워 다리를 젓가락에 돌돌 감는다. 그렇게 낙지를 꼼짝 못하게 만든 후 참기름소금장에 찍어 머리부터 꼭꼭 씹어 먹는다. 입천장에 낙지의 빨판이 달라붙게 되고, 힘쎈 낙지다리가 자꾸 입안에서 빠져나오려고 하지만 재빨리 잘근잘근 씹는다. 오돌오돌하고 물컹물컹한 식감. 씹을수록 고소하고 쫄깃쫄깃한 이 살아있는 맛을 이곳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워매, 죽여 줘부는 거!"
그런데 산낙지는 아무나 통째로 먹지 못한다. 마니아가 아니면 이른바 '탕탕'이라고 해서 잘게 썬 낙지를 참기름소금장에 찍어 먹는 정도다. 그런데 통째로 먹어야 먹는 것 같고 맛도 제맛이라고 하니 산낙지로만 먹던 걸 통마리로 굽기 시작했다. 이게 바로 호롱구이의 시초다. 원래는 나무젓가락이 아니고 짚을 사용했다고 한다. 세발낙지 한 마리를 통째로 볏짚에다 찬찬히 감은 뒤 갖은 양념과 참기름을 발라 구운 호롱구이는 영암이 아니면 맛보기 어려운 이곳의 향토음식. F1 자동차경주대회보다 이 세발낙지 호롱구이가 영암군의 더 큰 효자 노릇을 한다. F1대회는 고작 2박 3일간 사람들을 몰고 올 뿐이지만 낙지 호롱구이는 365일이기 때문이다.
영암의 대표적인 낙지골목은 학산면 독천리다. "강호동이가 한번 왔다 가고는 정말이지 대박 나부럿어." 이곳 토박이로 낙지호롱구이 전문점을 하고 있는 한라식당 주인 심희자(68) 할머니는 "이전엔 연포탕과 갈낙탕이 주 메뉴였는데 이젠 호롱구이"라면서 즐거운 비명이다. 특히 향토음식 소개 방송 프로에 단골 메뉴로 등장하면서 F1경기가 열릴 때는 '호롱구이도 먹고, 자동차경주도 보고'라는 1석2조 효과를 얻어 관객 유치에도 한몫을 톡톡히 해내고 있단다. 호롱구이 손님은 연중 이어지고 있다.
"자, 이제 우리 집 호롱구이 한번 잡숴 보실래요?"
손님을 세워 놓은 채 세발낙지 자랑에 열을 올리던 심 할머니가 잠시만 기다리라면서 호롱구이를 굽기 시작한다. 식당 가득한 고소한 냄새. 아직 형체도 드러내지 않은 낙지 호롱구이가 코부터 자극하면서 식욕을 돋운다. 이윽고 냄새만 풍기던 호롱구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고소한 냄새에다 윤기마저 자르르 흘러 상 위에 오르는 순간부터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나무젓가락에 돌돌 말린 세발낙지에 고추장과 깨소금 양념을 듬뿍 발랐다. 양념과 낙지가 함께 지글지글 굽혀 먹음직스럽기 그지없다. 코의 감탄이 눈으로 이동한다. 양념장에 살짝 찍어 낙지다리부터 벗겨 가면서 야금야금 뜯어 먹으란다. 이제는 입. 고소함이 입안 가득 퍼진다. 쫄깃한 구운 낙지의 식감도 일품이다. 다리를 풀어 가며 먹는 재미도 그만. 손가락도 맛을 느끼는 것 같다. 그래서 아이들이 더 좋아하는 메뉴. 낙지 특유의 감칠맛이 혀끝을 사정없이 자극한다. 질기지도 않고 쫀득쫀득한, 그리고 매콤하고도 고소한 맛에 반해 어느새 체면불구하고 그저 한 마리를 더 집어들게 만든다.
◆나무젓가락으로 중국산 낙지를 제압
"예부터 봄 주꾸미, 가을 낙지라는 말이 있지요." 심 할머니는 '무슨 낙지가 이렇게 맛있냐'는 일행 중 한 사람의 혼잣말도 놓치지 않고 즉각 끼어든다. "원래 낙지는 가을에 맛이 더 좋고, 주꾸미는 봄에 맛있다는 옛말이 있다"면서 영암 세발낙지 자랑에 해 저무는 줄 모른다. 심 할머니의 이야기는 전남에서도 영암군 미암면과 무안군 현경면, 해제면 그리고 해남군 산이면의 낙지를 제일로 친다고 한다. 그중에서도 영암낙지가 시장에서 한 금을 더 받는다면서 다리가 길고 가늘고 쫄깃하기로는 최고라는 것. 그냥 슬쩍 삶아 내기만 해도 간이 저절로 맞고, 후루룩 국물째 들이마셔도 될 정도로 육질이 부드럽기 그지없단다.
"지친 소한테 낙지를 먹인다는 얘기를 들어봤어요?" 신바람이 난 심 할머니는 농사일에 지친 소에게 낙지 서너 마리를 먹이면 금방 원기를 회복할 정도로 힘을 낸다는 이야기와 자산어보 기록까지 소개하면서 낙지 예찬론을 펼친다. 영암군 홍보담당이 따로 없다.
"영암산이라야 젓가락에 다 감기지 다른 곳의 낙지는 다리가 짧아서 젓가락에 반도 채 감기지 않아요." 그래서 심 할머니가 쓰는 낙지는 100%가 영암산. 낙지 업자가 중국산 수입낙지를 섞어 몰래 가져다주면 대번에 들통난다는 것. 중국산은 다리가 굵은 데다 뻣뻣하고 짧아서 젓가락에 감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중국산은 발도 못 붙이제. 여그가 어데라고!" 바로 20㎝짜리 나무젓가락이 '숏다리' 중국산을 견제하는데 큰 역할을 맡고 있다. 세상에! 독특한 향토음식 조리법이 기막히게도 영암 특산품인 세발낙지의 국내산 품질인증을 효과적으로 하고 있는 셈이다.
이 멋지고도 기가 찬 호롱구이를 위해 심 할머니가 하는 낙지 손질은 이렇다. 먼저 낙지머리 속의 내장을 꺼내고 먹통을 제거한 다음 소금을 넣고 부드럽게 주물러 깨끗이 씻는다. 소금으로 씻는 이유는 낙지다리 흡반 속의 뻘 흙을 제거하기 위해서다. 나무젓가락 끝에 낙지 머리를 끼우고 다리 부분을 돌돌 말아서 소금과 참기름으로 밑간을 해 둔다. 애벌구이 전에 밑간을 하는 이유는 나중에 고추장 양념을 발라 구울 때 겉만 타지 않고 속까지 골고루 익게 하기 위한 것. 그 다음 석쇠로 천천히 은근한 숯불에 애벌구이를 한다. 애벌구이 한 낙지를 깨소금과 고추장 양념을 발라 뒤집어 가면서 숯불에 다시 구워 손님상에 낸다. 심 할머니집의 호롱구이는 마리당 5천원. 크기와는 상관없다.
◆지역 경제를 이끄는 힘찬 세발낙지
기온이 떨어지는 요즘 전남 영암 앞바다는 낙지잡이 어선으로 불야성이다. 초가을부터 시작되는 낙지잡이는 겨울까지 이어진다. 밤에 낙지를 잡는 것은 밤이 돼야 낙지가 활동하기 때문이다. 밤바다 야경은 찬바람이 불기 시작해서 맛이 드는 '가을낙지'가 겨울까지 이어짐을 보여주는 것. 이 기간은 갯벌에서도 손전등을 든 아낙들의 낙지잡이 행렬이 이어진다. 뻘 구멍 깊숙하게 자리 잡고 있던 낙지가 밤이 되면서 먹이활동을 시작해 갯벌로 나와 있는 것을 양동이에다 그냥 주워담기만 하면 된다. 이처럼 밤새도록 열심히 잡는 것는 비싼 값에 인기리 팔리기 때문이다. 영암 세발낙지 호롱구이의 인기가 우리 바다를 지키고, 우리 어민을 먹여 살리고 있는 것이다.
가을 낙지에 대한 기록은 조선후기부터 시작된다. 정약용의 형인 정약전이 쓴 자산어보에는 음력 9, 10월이면 세발낙지 배 안에 밥풀 같은 알이 가득 차 있는데 이때 사람들이 즐겨 먹을 정도로 맛이 최고로 좋다고 기록돼 있다. 알이 밴 가을낙지는 쇠젓가락도 휘게 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영암지역에서는 기를 북돋우는 보양식이다. 아미노산의 일종인 타우린이 많아 갯벌 속의 산삼이라고도 불린다. 가을낙지가 쏠쏠한 돈벌이가 된다고 해서 이곳에서는 '관(串)낙지'라고도 부른다. '돈꾸러미 낙지'라는 뜻이다. 갯벌 색깔을 닮아 몸 전체에 잿빛 윤기가 흐르는 영암 세발낙지. 외관상 머리통이 작고 미끈하면서 타원형이고 긴 다리가 가늘고 쭉 빠진 게 아무리 봐도 '쭉쭉빵빵'형이다. 새까만 눈도 톡 튀어나와 있다. 게르마늄 성분이 풍부한 영암 일원의 갯벌에서 자라서 영암 세발낙지는 기운이 더욱 세차다고 자랑한다. 영암 낙지 거리 현지에서는 이 힘찬 세발낙지와 수입산을 언제든지 비교해 볼 수 있다. 산지가격은 요즘 20마리 한 접당 6만원 정도. 전국 택배도 가능하다.
기를 북돋운다는 영암 세발낙지는 '기의 고장 영암'이라는 영암군의 슬로건을 낳기도 했다. 세발낙지 홍보에는 군보건소도 팔을 걷어붙였다. 주마가편(走馬加鞭). 안 그래도 잘나가는 세발낙지 호롱구이에 더욱 박차를 가한다. 보건소 측은 "세발낙지는 빈혈 예방과 강장제인 타우린 성분과 단백질, 그리고 비타민, 철 등 다양한 무기질을 함유하고 있어 원기회복에 대단히 좋다"고 자랑한다. 소갈비+낙지를 재료로 한 갈낙탕을 분석해 영양성분표를 낙지전문 식당마다 걸어 놨다.
"여기 수조에 있는 낙지 머리를 잡고 떼어 봐요. 어디 떼어 내나 한번 보자."
영양분석표를 쳐다보고 있는데 갑자기 심 할머니가 내기를 건다. 수조에 붙어 있는 세발낙지 머리통을 잡고 떼내려는데 좀처럼 떼어지지가 않는다. 골무만 한 작은 세발낙지의 길고도 질긴 다리가 유리벽에 접착제처럼 찰싹 달라붙어 힘차게 저항한다. 쎄다. 이를 보는 심 할머니가 득의양양(得意揚揚)하여 빙그레 웃고 있다.
향토음식산업화특별취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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