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지명·풍속·장터…대구의 무형유산, 1천편 詩로 '인문지리 시집'
저 만장것치
질쭉한 푸른 띠
물결은 푸르러 푸르러
잘 필치논 파아란
모빈단 같구나
촌색씨 모양으로
행동거지는 수더분하고
행보는 오뉴월 해 넘어가듯
늬엿늬엿 느려터졌고
도무지 소리가 없다
매양 주고 받음이 넉넉해서
부리는 손이 크다
새빅이마 시골 머시마아들이
줄줄이 들고나오는
오좀요강 부시는 것도
선연쿠로 받아주고
촌동네 처녀아아들이 보듬고 나온
부끄러븐 서답빨래도
순순히 받아주고
시골 아낙네, 공장서 일하는 신랑들
기름 묻은 작업복, 기름빨래도
천연시립기 받아주고
하늘아래 온갖 잡동사이 빨래도
다 받아준다
너는 한때
눈물이었다가
웃음이었던 적이
웃음이었다가
눈물이었던 적이
기하이뇨?
(시 '금호강' 중에서.)
그는 자신이 나고 자란 대구의 옛 지리와 풍물을 시로 읊는다. 유년기를 보낸 칠성동 고향집부터 명성사진관'자유극장'짜장면집 신성루 등 추억의 명소는 물론 무태 몰개(모래)밭'검다이(대구 북단의 옛 지명) 보리밭'배자못 등 이제는 찾을 수 없는 지명에다 소전꺼래(우시장) 알분다이 할매'덕수의원 삐땍이 원장'박작대기 박중양 등 기억 속의 인물까지. 시의 소재는 제한이 없다. 그리고 시 '금호강'에서는 민초들의 웃음과 눈물 섞인 삶을 능히 품는 고향 대구의 장대함도 읊는다. 이달 20일 대구를 찾은 상희구(70) 시인을 만났다.
◆시인 상희구를 만든 힘들고 고달팠던 삶
그의 최근작인 연작시집 '대구'는 그가 유년기를 지나 청년기를 보내고 서울로 가기까지 1940년대부터 30여 년간 머무른 대구의 모습을 담고 있다. 고향집을 노래한 '칠성동'부터 장시 '금호강'까지 모두 100편이다.
그는 "삶이 힘들고 고달팠기 때문에 시가 나왔다"고 말했다. "어린 시절 힘들면 뛰쳐나가 헤매고 다닌 곳이 많습니다. 그러면서 혼자 나누던 대화가 머릿속에 각인돼 지금 시로 빚어낼 수 있게 됐습니다." 일 나가신 엄마는 오지 않는 춥고 배고프던 어릴 적 동지섣달의 기억이 담긴 칠성동. 키보다 높은 보리밭을 헤치고 들어가 길을 잃고 헤매던 아찔하고도 묘한 기억이 담긴 검다이 보리밭 등 그가 발걸음을 내디딘 장소마다 갖가지 추억이 담겨 있다.
집안 사정이 여의치 않아 그는 중학생 시절 학업을 중단하고 대구소방서에서 사환으로 일했다. 허드렛일을 하는 중에도 틈틈이 공부하던 그에게 직원들이 학업을 계속 하라며 학비를 모아 주기도 했다. 당시 대구소방서 부서장이었던 오달용 씨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시 '오달용 소방감'은 그때의 고마움을 표현한 시다.
헌 참고서로 밀린 공부를 하기 위해 당시 대구시청 뒤에 있던 헌책방을 집 드나들듯 했다. 그러면서 접하게 된 각종 문학서적을 탐독하기 시작했다. 그는 모든 '문화'에 대한 탐미 욕구를 주체할 수 없었다고 했다. 당시 대구의 거의 유일한 전시 공간이었던 미국 공보원을 드나들며 각종 예술 전시회를 챙겨 보고, 서울에서 공연단이 오면 빼놓지 않고 찾았다.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시인이 되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어린 시절부터 이어진 삶의 힘겨움은 계속 됐다. 청년 시절 섬유사업에 손을 댔다가 부도가 나 지하 셋방살이를 하는 등 '쫄딱' 망하기도 했다. 실패한 사업가 신세가 돼 이리저리 배회하는 하루하루를 보내도 봤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노벨문학상을 받은 칠레 시인 '파블로 네루다'의 시를 우연히 접했다. "시는 당시 제게 난해했지만 알 수 없는 이유로 가슴이 '펄떡펄떡' 뛰었습니다." 지난날 힘겨웠던 삶은 오롯이 '시상'(詩想)의 바탕이 됐고, 줄곧 이어진 문화에 대한 탐미는 결국 '시'라는 표현 형식을 선택한 것. 이후 스승 김윤성 시인을 만나 시 쓰기에 매진했고, 1987년 첫 작품을 발표하며 시인으로 등단했다.
◆경상도 사투리와 어머니, 그리고 시
그의 연작시집 '대구'는 이전에 발표한 작품들과 조금 다르다. 사투리를 시적인 언어로 승화한 것이 특징이다. 그래서 마음속으로 읽어도 무방한 다른 시와 달리 직접 소리를 내어 읊어봐야 그 맛을 느낄 수 있다.
"경북 청도 출신인 어머니의 영향이 컸습니다. 청도와 대구와 경산을 아우르는 사투리를 구성지게 잘 쓰셨어요. 어머니는 언어를 생활 속에 풀어내는 감각도 뛰어나셨습니다. 동네 꼬마들 별명을 곧잘 지어주셨지요." 새벽부터 일어나 돌아다니는 옆집 꼬맹이는 '돌래방구', 덩치 작은 아이는 '딸보'라는 식이었다. 이러한 '수사법'은 그의 시 쓰기에도 바탕이 됐다.
그는 어머니의 어투를 계속 좇고 있다고 했다. 전해 들은 어투를 시에 담고 있지만 세월이 너무 흘러 뜻을 모르는 사투리는 고증하기 위해 노력한단다. "시간이 된다면 어머니 고향인 청도의 경로당을 방문해 할머니들께 묻고 싶은 어투가 많습니다. 사투리를 연구하는 언어학자들도 많이 만나고 싶어요. 물론 사투리의 뜻을 정확히 규명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겠지요. 경상도 사투리는 문지방만 넘어도 집집마다 다르다고 하잖아요."
토속명칭도 기억에서 사라져간 것이 많다. 예를 들면 어릴 적 봤던 대구 노곡동의 긴 징검다리에 대해 시를 쓰고 싶은데 기억이 차마 더듬지 못하는 이런저런 돌 명칭을 알아내지 못해 애를 먹고 있다고. 찾다 보면 일제강점기의 잔재로 남은 용어가 많단다. 이는 시에 쓸 수 없기에 전국을 누비며 토속명칭 자료를 찾는 것도 시를 쓰기 위한 준비 작업의 하나다.
◆시로 쓰는 대구의 인문지리서
시집 '대구'는 그가 구상하고 있는 연작 시리즈의 첫 신호탄에 불과하다. 내년에 두 번째 시집이 나온다고 했다. "제목은 '추석 대목 장날'입니다. 같은 제목의 장시가 시집 맨 첫 편으로 실립니다. 시끌벅적한 장터 풍경을 들여다보면 흥정하는 말부터 욕설까지 온갖 사투리의 향연이 펼쳐집니다. 일종의 '마당극' 같은 구수한 분위기지요."
이후 차례로 연작시집을 내 10집까지, 약 1천 편의 대구 '고향시'를 발표한다는 계획이다. 대구의 전통음식'세시풍속'향교'사찰'옛 지명 등 대구의 모든 것을 소재로 삼아 시로 풀어내겠다는 것. 시의 각주에는 소재 관련 자세한 설명을 담아 시집만으로도 능히 '시로 읽는 대구의 인문지리서' 역할을 하도록 만들겠단다.
"대구의 유형 문화는 한창 발굴되고 있습니다. 요즘 인기 있는 '대구 근대 골목투어'가 대표적인 결과물이지요. 그런데 무형으로 된 언어'서사'생태'정서 등의 문화는 아직 발굴이 덜 돼 있습니다. 저는 시를 통해 발굴하려고 합니다. 특히 그때 그 시절의 '정서'는 시가 아니면 제대로 표현하기 힘듭니다."
이는 경상도 지역 전체를 아우르는 작업이기도 하다. 그는 "대구는 경상도의 모든 사투리가 모여든 곳"이라고 말했다. 옛적부터 대구 북부에는 점촌'안동'의성에서, 서부에는 김천'상주'고령에서, 반야월(동부)에는 영천'포항'경주에서 사람들이 드나들었고, 또 자리 잡고 살면서 말의 흔적도 남게 됐다는 것. "시에 담긴 사투리에 대해 같은 지역 사람끼리는 알아듣고 재미있다는 반응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다른 지역 사람도 못 알아듣더라도 그 나름의 감흥과 통하는 맛을 느낍니다. 이것이 사투리의 매력입니다."
인터뷰가 끝나고 그는 시 '금호강'의 배경이 된 대구 금호강변 아양루에 서서 기사에 게재할 사진 속 주인공으로 포즈를 취했다. 사진 촬영을 마치고 취재진과 헤어지며 그는 아양루에 한 번 더 가봐야겠다며 발길을 되돌렸다. 아양루에 걸려 있던 현판 속 글귀들이 궁금했던 것. 아양루도 곧 그의 시어로 재탄생할 듯 보였다.
황희진기자 hhj@msnet.co.kr
사진'김태형기자 thkim21@msnet.co.kr
◆상희구는=1942년 대구에서 태어나 대구상업고등학교를 졸업했다. 1987년 월간 '문학정신'에 '낮꿈' 등 네 편의 시가 '문학정신 신인상'으로 당선돼 등단했다. 첫 시집 '발해 기행'(1989) 이후 '요하의 달'(1996), '축몽사자'(2006), '숟가락'(2008) 등의 시집을 펴냈다. 지난해 월간 '현대시학' 4월호부터 연작시 '대구' 연재를 시작해 올해 2월호로 100편의 대장정을 마쳤다. 이를 모은 시집 '대구'(2012)를 5월에 펴냈다. 현재 한국시인협회 심의위원으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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