通 하였느냐?… 토론 열풍 '허와 실'

입력 2012-12-22 07:11:24

'○○, 이제 재미있게 합시다!

승부가 있는 ○○배틀, 끝장○○!

3無! 주제와 형식과 수위 제한 없는 파격!'

한 TV 프로그램의 기획 의도다. ○○에 들어갈 단어는 무엇일까? 재미있게 한다고 하니 '놀이'의 한 종류인 듯하다. 승부가 있다고 하니 '스포츠 경기'인 것 같기도 하다. 주제와 형식과 수위 제한이 없다고 하니 '전위예술'의 한 장르인가 싶기도 하다.

정답은 '토론'(討論)이다. 해당 TV 프로그램은 토론 프로그램이다. 토론의 사전적 의미는 '어떤 문제에 대해 여러 사람이 각각 의견을 말하며 논의하는 것'이다. 이런 기본적인 의미를 프로그램 기획 의도에서는 찾기 힘들다. 다만 프로그램을 보면 놀이처럼 흥미로운 분위기, 격투기 경기를 떠올리게 만드는 상호 비방전, 그리고 전위예술로 착각할 만한 '아찔한' 표현 수위를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요즘 우리나라 토론문화가 이런 분위기로 가고 있다.

◆TV 토론 프로그램 인기

요즘 국내에 불고 있는 토론 열풍은 TV 토론 프로그램의 대중적 인기로 가늠할 수 있다.

MBC'KBS'SBS 등 지상파 3사는 1980년대 후반부터 토론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공익성 강화를 위한 교양 프로그램의 취지로 출발했다. 방송 시간대는 오후 11시~자정 이후였다. 당연히 시청률은 저조했고, 프로그램의 존립이 위협받기도 했다. MBC는 2000년 6월 '100분 토론'의 저조한 시청률을 이유로 진행자를 고 정운영 씨에서 당시 사회평론가로 활동하던 유시민 씨로 교체했고, 그래도 시청률이 저조하자 같은 해 11월에는 정규 방송 대신 외화를 틀기도 했다.

이후 상황이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2001년 4월 SBS가 '시사토론'을 내놓으며 KBS '생방송 심야토론'과 함께 지상파 3사 심야토론 프로그램 시대를 열었다. 그러자 MBC 100분 토론은 2001년 8월 한국축구대표팀이 체코와의 평가전에서 0대 5로 패배하자 곧장 '한국축구 히딩크호 이대로 좋은가' 편을 방송하며 "시청률을 너무 의식한 기획 아니냐"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이전까지는 추상적인 거대 담론이나 딱딱한 정책 관련 주제를 다루던 것에서 다소 가벼운 흥미성 이슈도 다루기 시작한 것.

이어 '노무현 대통령 탄핵 사태'(2004년), '인터넷 논객 미네르바 사건'(2008년), '용산참사'(2009년) 등 뜨거운 여론이 집중된 사안이 우리 사회에 잇따랐다. 곧장 토론 프로그램에서 주제로 삼았다. 특히 노 대통령 탄핵 가결 직후 방송된 KBS 생방송 심야토론 '탄핵 이후 정국, 어디로 가나' 편은 12.7%라는 당시 토론 프로그램으로는 초유의 시청률을 기록하기도 했다.

핫이슈가 없을 때에도 진중권(대학 교수), 노회찬(정치인), 신해철(뮤지션) 등 다양한 출신의 '스타 논객'들이 각종 어록을 남기며 프로그램에 흥행 요소를 가미했다. 시사에 대한 관심을 충족하는 것은 물론 토론자들의 화려한 언변에도 시청자들의 관심이 집중됐다.

◆'토론의 오락화' 과열 양상도

인기 가도를 달리던 TV 토론 프로그램들이 최근 과열 양상을 보이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토론 형식의 변형 내지는 파괴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는 것.

먼저 난상 토론이 대세다. MBC 100분 토론 제작진은 지난해 6월 "국내 토론 프로그램 최초로 사회자가 발언 순서를 지정하는 방식에서 벗어나 난상 토론 방식을 도입한다"고 밝혔다. "토론자들이 상대방의 논리적 모순을 날카롭게 지적할 수 있는 자유 공간을 열겠다"며 "격의 없는 '끝장토론'을 위해 진행 규칙도 바꾸겠다"고 덧붙였다. 이전에도 격의 없는 토론이 일부 펼쳐졌지만 공식적으로 토론 방식의 변화를 언급한 것은 처음이었다. 이면에는 "인기 진행자 손석희 씨가 하차하면서 프로그램 인기가 떨어지자 자구책을 내놨다"는 분석이 있었다.

결론이 날 때까지 '끝장'을 본다며 토론 시간도 기형적으로 늘린다. tvN '백지연의 끝장토론'이 대표적이다. 두세 시간은 기본이고, 지난 4월 총선을 앞두고 국내 최초로 8시간 생방송을 하기도 했다. 이날 토론자로 출연한 새누리당 이상돈 전 비대위원이 방송 4시간 30분 만에 건강 문제를 이유로 퇴장하며 방송 사고를 초래하기도 했다.

토론이 논쟁 개념으로 바뀐 것은 이제 옛말이다. 논쟁은 다시 승패를 확실히 가르는 '배틀'(battle'싸움) 개념으로 바뀌고 있다. 기존 토론자들도 변화를 적극 수용하고 있다. 최근 인기를 얻고 있는 '사망유희 토론 배틀'이 대표적. 인터넷 매체인 곰TV가 생중계하는 프로그램으로 토론자 2인이 출연해 매회 다른 주제로 설전을 벌인다. ('사망유희'는 1978년 이소룡이 출연한 '살벌한' 액션 영화)

지난달 11일 큰 인기를 얻고 있는 보수와 진보 논객 변희재와 진중권이 토론 배틀을 벌였고, 서버 폭주로 중계 중단 사태를 빚기도 했다. 다시보기 영상은 누적 조회 수 100만 건을 돌파했다. 토론 내용보다는 설전 기술의 현란함과 완성도에 관심을 보이는 네티즌이 적잖다. 대학생 김찬준(25'포항시) 씨는 "토론자들이 상대 의견에 어떤 코멘트로 '반격'하는지, 또 정확한 사실을 근거로 대는지 눈여겨본다"며 "토론 내용은 기억이 잘 안 난다. 격투기나 레슬링처럼 어떤 기술을 구사해 먹혀들었는지와 누가 이겼는지가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기는 토론' 배우는 학생들

대학생 박모(25) 씨는 최근 토론 스터디에 들었다. 요즘 기업 공채 전형에 십중팔구 '토론면접'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혼자 노력할 수 있는 영어나 필기시험 준비와 달리 토론면접은 또래들과의 연습이 필수적이다.

박 씨는 토론 연습 첫날 깜짝 놀랐다. "토론대회에 여러 번 출전했다는 동료가 갑자기 제 말을 끊더니 심문하듯 딴죽을 거는 겁니다. 얼굴이 붉어져 아무런 말도 못했어요." 알고 봤더니 상대를 당황하게 만들어 토론에서 우위를 선점하는 '스킬'이란다. 박 씨는 "나는 쓰지 않더라도 경쟁자가 쓸 경우를 대비해 '이기는' 토론 스킬을 숙지해둬야 한다"고 말했다.

토론 스터디는 물론 학원 수업이나 자기계발서 등을 통해 토론의 승자가 되는 법을 배우는 대학생들이 적잖다. 학점을 잘 받는 것은 물론 취업의 당락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기업이 신입사원을 뽑을 때 토론면접을 보는 이유는 상대방을 논리적으로 설득하는 '프레젠테이션' 역량을 보기 위해서다. 많은 업무에서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기는 토론이 득세하는 원인으로 청소년기 토론 교육부터 잘못 출발했다는 얘기도 나온다. 일선 학교에 토론 교육이 도입된 지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제대로 된 토론보다는 언쟁 붙기 혹은 말솜씨 뽐내기가 만연하다는 것. 지역 한 초등학교 교사는 "토론 수업을 하면 선행 학습을 한 아이 한둘이 말솜씨를 뽐내고, 나머지 아이들은 기가 죽어 있거나 일부는 말싸움을 걸기도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조금 못 뛰어도 좋은 체육 시간이나 조금 못 불러도 좋은 음악 시간과 달리 아이들에게 교과서가 원하는 수준 높은 토론 소양을 기대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기도 하단다.

전문가들은 학교만큼이나 대중매체 등 학교 바깥 토론 문화가 청소년들에게 적잖은 영향을 끼치고 있는 만큼 변화가 필요하다고 조언한다. 한준희 대구시교육청 장학사는 "경청이 우선되고 소통이 중심이 되는 토론 문화가 만들어져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청소년이나 대학생 대상 토론대회가 처음엔 좋은 취지로 시작됐지만 일부는 경쟁 구도만 강화되는 등 변질됐다. 토론이 승패만 남는 대결의 장이기보다는 다양한 발상과 논리를 자유롭게 공유하는 축제의 장이 돼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토론에 기본은 분명 있지만 너무 정형화된 틀만 따지면 사교육 과열 등 부작용을 유발할 수 있다. 어릴 적부터 다양한 토론 방식을 접하며 유연한 소통 능력을 몸에 익히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황희진기자 hhj@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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