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문화의 세계화] ⑧일본에 말 전해준 대가야인

입력 2012-12-22 07:55:50

고령서 제작된 대가야 마구, 일본 고분 곳곳서 무더기 출토

대가야산 마구가 쏟아져 나온 나가노현 미야가이토 유적에서 함께 나온 순장된 말. 머리와 몸통, 다리의 뼈대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
대가야산 마구가 쏟아져 나온 나가노현 미야가이토 유적에서 함께 나온 순장된 말. 머리와 몸통, 다리의 뼈대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
미야가이토 유적에서 출토된 대가야산 철제 마구.
미야가이토 유적에서 출토된 대가야산 철제 마구.
나가노현 이다시 아제치고분. 한반도에서 유래된 횡혈식석실(돌로 쌓아 올린 묘)인데 귀걸이, 마구, 칼, 화살촉 등 대가야산 유물이 대거 부장돼 있다.
나가노현 이다시 아제치고분. 한반도에서 유래된 횡혈식석실(돌로 쌓아 올린 묘)인데 귀걸이, 마구, 칼, 화살촉 등 대가야산 유물이 대거 부장돼 있다.

'일본인은 원래 기마민족이었다.'

도쿄대 교수 에가미 나미오(江上波夫'1906~2002)는 1948년 일본민족의 기원과 관련, 충격적인 학설을 내놓았다. 그는 동북아시아의 기마민족이 일본 황실의 기원이라는 '기마민족정복왕조설'(騎馬民族征服王朝說)을 발표해 고고학계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북방 유라시아 기마민족이 한반도를 통과하여 일본에 상륙해 야마토(大和) 정권을 세웠다는 것인데, 일왕을 포함한 일본 지배층은 기마민족의 후예라고 했다. 아무런 역사적 근거나 물증이 없는데도 일본에 널리 퍼져 있는 학설이다. 그가 이런 학설을 내놓은 배경 중 하나가 5, 6세기 고분에서 출토된 엄청난 양의 말(馬)뼈와 마구(馬具), 무기류 같은 전쟁무기 때문이다. 그 이전 시대에 나오는 농경유물 중심의 출토품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박천수 경북대 고고인류학과 교수는 "5세기 중반부터 일본에 말(馬)과 첨단 무기를 전해준 것은 가야인들이었다. 특히 동일본 지역과 규슈지역은 대가야로부터 말이 처음 도입됐다"고 했다. 에가미 교수의 학설은 한반도로부터의 말'무기의 전래를 인정하기보다는, 기마민족설이라는 상상력을 발휘함으로써 '변종된 황국사관'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 말을 사육할 줄 몰랐던 일본

1천500여 년 전 일본에는 말의 사육 기술이 아예 없었다. 식용으로 사용했다고는 하지만, 말을 키우거나 제대로 부릴 만한 능력이 전혀 없었다. 훗날 전국시대 때 다케다 가문의 기마군단이 사상 최강으로 불리며 전역을 휩쓸기도 했지만(1575년 나가시노 전투에서 오다 노부나가의 총포 전술에 의해 섬멸됨) 이 당시만 해도 말을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민족은 아니었던 것 같다. 5세기 중'후반 때의 고분을 발굴하면 말뼈와 마구 등이 무더기로 출토되곤 했다. 당시만 해도 주인이 죽으면 말을 순장하는 풍습이 있었는데, 말의 출산지는 확인할 길이 없지만 마구는 대부분 대가야산이다. 이는 고령지역 고분에서 나온 마구의 제작기법과 형태 측면에서 거의 똑같다.

나가노현의 미야가이토(宮垣外) 유적과 아라이하라(新井原) 고분 등에는 대가야산 마구와 함께 한 마리 분의 말뼈가 출토됐다. 미야가이토 유적의 말뼈는 머리, 다리와 몸통 뼈대가 흙속에 고스란히 남아있어 당시의 순장 풍습을 짐작게 한다. 박천수 교수는 "이 유적에 말 한 마리와 수많은 마구가 함께 묻혀 있던 것에 미뤄 대가야로부터 건너온 마사 집단이 이곳에서 활동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아 보인다"고 했다. 대가야인들이 말을 갖고 들어와 집단으로 활동하면서 사육법과 제어법을 일본인들에게 전수했다는 것이다. 미야가이토 유적 발굴에 참여한 이다(飯田)시 상향고고박물관의 요시가와 유타가(吉川豊'55) 씨는 "그 주변에서 모두 16기의 고분이 발견됐고 땅 위에 동그랗게 나와있는 무덤의 형태에 미뤄 그리 신분이 높은 이들의 무덤은 아니었다"면서 "한반도에서 건너온 마사 집단의 무덤일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기마민족의 후예는 가야인?

대가야산 마구는 나가노현, 후쿠이현 쥬젠노모리 고분 등 일본 서부지역뿐만 아니라 열도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다. 오사카부 나가모치야마 고분, 와카야마현 오타니 고분, 구마모토현 에타후나야마 고분 등에서 나온 마구는 고령지역에서 제작돼 일본열도에 유통시킨 것이다. 가야산 마구의 특징은 특유의 재갈과 행엽(杏葉'가슴걸이나 후걸이에 매다는 장신구) 등이 함께 묶여 있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5세기 후반 대가야로부터 말과 관련된 일체의 기술을 배운 일본은 6세기 중'후반부터 가야식을 개량해 독자적인 일본식 마구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그렇다면 대가야인들은 무엇 때문에 강력한 마사 집단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선진화된 말 사육법을 갖게 된 것일까. 한국 학자들은 서기 400년의 광개토왕의 남정(南征)에 주목한다. 광개토왕이 파견한 보기(步騎) 5만 군대로 인해 금관가야는 급격히 쇠퇴했고, 대가야가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됐다. 대가야는 고구려 기마대의 위용에 자극받아 말의 사육과 기마대 양성에 주력했을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5세기 중반 이후 대가야의 마사 집단이 정치적 이유나 정변을 피해 일본으로 대거 건너갔을 수도 있고 교역 차원에서 말 사육 기술을 전수하고 마구를 전해줬을 수도 있다. 그렇더라도 말의 사육과 제어법은 고구려→대가야→왜로 전래하는 과정을 거치고 있다. 에가미 교수가 이를 참조해 '기마민족정복왕조설'을 제시했을 수도 있지만, 어쨌든 일본에서 최초로 활동한 기마민족은 대가야인들이 아니었을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박병선기자 lala@msnet.co.kr

사진'김태형기자 tkkim21@msnet.co.kr

최신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