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 녀석은 나보다 훨씬 많이 가졌다. 의사 부모를 둔 덕분에 돈 걱정 한 번 없이 학교에 다니고, 고3 수능 시험 전날에도 PC방을 갈 정도로 느긋했다. 아들과 달리 나는 치열하게 살고 있다. 나이 마흔에 수련 생활을 해서 전문의가 됐고, 도우미 아줌마 없이 억척같이 직장 생활을 한다. 새벽부터 일어나 아침식사를 준비하면서 고3 올라가는 딸아이 도시락까지 준비해두면, 아들은 부스스 일어나 눈곱도 떼지 않고 식탁에 앉아서는 왼손으로 스마트폰을 보면서 밥부터 먹는다.
내 눈에 아들은 그저 게으르고 한심한 대학생으로만 보였다. 그가 바뀌었으면 했다. 인생이란 처음과 마지막은 선택할 수 없으니까. 그 중간에 있는 절대적인 자유를 정성껏 살아내야 한다는 식의 이야기를 꺼내 봤자 아들은 엄마의 호스피스에 대한 허풍으로만 생각한다. '인간은 죽는다'는 깨달음이 대단한 것은 아니다. 그저 사실일 뿐이다.
이것이 의사로서 들려줄 수 있는 죽음 강의의 핵심이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가 재미있으려면 나이를 어느 정도 먹어야 한다. 아니면 죽고 싶을 만큼 괴로움을 간직한 사람이거나. 아들 녀석이 내 이야기에 시큰둥하니까 젊은 대학생들에 대한 죽음 강의는 두려움이 있었다. 그래서 강의 요청이 들어오면 적당한 핑계로 거절하고 있었다.
그러나 모 대학의 심리학과 교수의 부탁으로 엉겁결에 한 죽음 강의는 꽤 성공적이었다. 강의 시간 내내 학생들은 죽음에 집중했으며 호스피스 봉사자 이야기에 감격했다. 단 한 명도 졸거나 스마트폰으로 문자메시지를 보내지 않았다. 암을 이기지는 못했지만 그들의 인생이 실패는 아니라는 말기암 환자들이 들려주는 희망적이고 따뜻한 이야기에 도취했다.
심지어 강의 마치고 인형처럼 까만 컬러렌즈를 착용한 한 여학생은 나를 살포시 껴안고 눈물도 흘렸다. "한 때 저도 많이 아파서 학업을 중단할 뻔도 했어요. 다행히 지금은 건강해졌지만요. 괴로워서 그 사실을 깜박 잊고 살았는데 선생님 이야기 듣고 다시 생각이 났어요. 호스피스 병동에 꼭 봉사하러 가겠습니다"라고 말하는 남학생도 있었다. 초대해준 젊은 여교수도 먼저 떠난 친구가 생각난다며 말을 잊지 못했다. 뜨거운 반응의 이유가 궁금해졌다.
그들이 치열하게 겪은 입시경쟁과 앞으로 닥쳐올 취업 불안감은 모르긴 해도 우리 병동의 환자만큼이나 힘든 상황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 전 사회 지도층 인사 60여 명이 외국 국적을 얻어 자녀를 외국인학교에 입학시킨 일이 있었고, 중학생 아들 내신 성적에 유리하게 만들려고 시어머니 사망 시간을 하루 앞당겨 달라고 부탁하는 며느리를 경험한 적이 있었다. 경쟁 지상주의는 청년 세대를 자살로 몰고 가고 있다. 나 또한 그런 엄마였을지 몰랐다. 그리고 이해했다. 나보다 많이 가진 아들도 힘이 들었겠구나!
김여환 대구의료원 호스피스'완화의료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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