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연필을 사용한다. 업무상, 원고 교정 때인데 대부분 몇 낱말 고치는 정도다. 글씨는 다른 사람이 겨우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휙휙 날려 쓰기가 일쑤다. 잦게 사용하는 것이 아니니 연필이 영 어색하고, 글씨도 엉망이다. 연필보다는 컴퓨터 자판이 훨씬 익숙해졌으니 글씨가 비뚤고 예쁘지 않은 것은 당연하다.
40, 50대 이상은 연필에 대한 추억이 많다. 학창 시절에는 연애편지를 연필로 많이 썼다. 볼펜이나 하이테크 펜으로 쓰기도 했지만, 연필보다는 정감이 덜했다. 어릴 때는 어른들로부터 글씨 연습은 잉크로 쓰는 펜이나 연필로 해야 한다고 들었고 다른 필기구도 없었으니 연필이 익숙했다. 잘못 써도 지우기 쉽고, 연필을 잡을 때 깎인 면의 다소 날카로운 촉감과 나무의 질감이 아주 좋았다. 조금씩 닳아가는 흑연 심을 보는 것도 재미있었고, 진하게 쓸 때는 침을 묻히는 바람에 혓바닥이 새까매지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흰 종이의 빈 공간과 연필심이 부딪치는 서걱거리는 소리가 정겨웠다.
개인적으로, 연필은 누님을 떠올리게 한다. 열 살, 세 살 차이인 두 누님은 초등학생인 동생을 위해 연필을 깎아주곤 했다. 얼마나 예쁘게 깎는지, 몇 자루를 가지런히 필통에 넣어 학교에 가면 친구들이 모두 부러워했다. 누님이 연필을 깎을 때면 옆에서 가만히 지켜보았다. 짧은 칼집에 들어 있는 직사각형의 칼이 연필에 닿아 슥슥거리며 나무가 잘려나가는 소리가 좋았다. 끝을 뾰족하게 만들려고 심을 갈면 뽀드득거리는 소리와 까만 가루가 쏟아져 나오는 모습도 예뻤다. 때때로 그 모습이 보고 싶어 학교에서 일부러 연필심을 부러뜨려 돌아오기도 했다. 누님은 아는지 모르는지 약간의 잔소리만 했을 뿐, 금세 깨끗이 깎은 연필을 필통 하나 가득 채워주곤 했다.
이제 그런 낭만의 시대는 지났다. 언제부터인가 누님 손의 자리를 연필깎이가 차지했고, 연필이 샤프와 볼펜 같은 필기구로 바뀌더니, 이젠 컴퓨터 자판이 대신한다. 문자, 카톡, 전화와 세련되고 편리한 다른 필기구 탓에 연필이 설 땅이 없다. 사실 연필은 많이 불편하다. 금방 닳아서 다시 깎아야 하고 심이 잘 부러지기도 한다. 때로는 심의 가루가 종이 위로 퍼져 글씨가 지저분해지기도 한다. 하지만 연필로 예쁘게 연서(戀書)를 쓰고, 며칠 동안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답장을 기다리는 즐거움을 안다면 실시간으로 사연을 주고받을 수 있는 첨단기술이 꼭 능사라고 할 수만은 없을 것이다.
정지화<논설위원 akfmcpf@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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