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춘추] 타이포 이야기

입력 2012-11-28 07:06:14

중국 상하이에 다녀왔다. 아트페어와 비엔날레도 가보고, 문화공간으로 바뀌어가고 있는 상하이의 옛 골목과 건축물들을 둘러보는 시간도 가졌다.

1933년에 영국 건축가가 설계한 도축장을 리모델링한 라오창팡과 예전엔 직물공장이었지만 이제 디자인 회사와 아트숍, 작가 작업실이 들어선 홍팡은 흥미로웠다. 이와 더불어 철물공장이었던 M50 등 예술적 맥락에서 새롭게 진화된 상하이의 건축물들도 매력적이었다. 그러나 내 시선을 강하게 끌었던 것은 도축장 벽에 남아있는 활자 이미지와 옛 골목과 시장통에서 본 간판들 속 타이포그래피였다. 본질이 흐려질 만큼 지나치게 손질하지도 않았고, 유난스럽지도 않았다. 무엇보다도 과거와 현재의 시간을 넘나들면서도 유유히 빛을 발하는 타이포그래피는 어떤 존재감을 가진 생명체 같았다.

그 대상이 책이건 거리의 간판이건 타이포그래피는 매우 중요한 디자인 파트다. 활자 디자이너이거나 타이포 그래퍼가 아니더라도, 적절한 폰트를 구사하는 것이 요즘은 많은 사람들에게 가능해졌다.

책을 만들 때 편집자는 텍스트의 내용과 목적 전달에 협조적인 서체를 고르기 위해 고심한다. 이는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적합한 톤을 통해 전달할 때 이해가 쉬운 것과 비교될 수 있다. 정확한 어조와 느낌의 전달을 위해 글자와 글자, 낱말과 낱말 사이의 공간을 정확하게 다루어야 하고, 이러한 원칙하에 페이지 레이아웃이 만들어진다. 그래픽 디자이너의 연륜은 활자를 선택하는 눈이 얼마나 세심한가와도 연결된다.

일을 하다 보면 특정한 서체에 대해서 아주 예민한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이 있다. 고딕체 같은 정통서체를 힘들어한다거나 필기체류나 정교한 디테일이 있는 서체를 부담스러워하는 등 이는 그들의 직업이나 개인적인 성향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활자는 책의 표정과 같아서 텍스트가 가진 내밀한 느낌을 반영하고, 효율적인 의사소통 도구가 되기도 하며, 사회 분위기와 시대적 조류를 보여주기도 한다.

중세의 정신을 담는 대표적인 서체였던 고딕체가 어느 시대에선 아주 고루한 향수로 취급되던 때도 있었다. 새로운 서체들이 시시각각 출현하는 세상에 살고 있지만 나는 텍스트의 본성을 잘 담아낸 서체로 작업된 책이 좋다. 또한 '정비'라는 이름 아래 세련된 서체로 획일화된 간판보다는 그들만의 정체성과 정서가 담겨 있는, 어느 길 모퉁이에서 만난 '냉면집' '이발소'라는 손글씨의 간판이 오히려 편안하다. 세상에 나쁜 서체는 없다. 다만 맞지 않는 서체가 있을 뿐.

나윤희 출판편집디자인회사 홍익포럼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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