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생각 행복편지] 잘난 것은 내림

입력 2012-11-27 15:43:00

예년과 달리 저녁 일찍 제상을 물렸습니다. 음복주를 나누면서 할아버지의 생전을 추모하는 이야기들을 주고받았습니다. 마치 추념사(?) 같은 큰형님의 이야기가 이번에는 너무 이례적이라 모두들 귀를 모았습니다.

"앞으로 할아버지 제사만은 두어 시간 앞당겨서 일찍 모시기로 하였네."

먼 길을 서둘러 와야 하는 작은 형님도, 늘 시간에 쫓기는 나도 성급하게 반겼습니다. 집안 대소사에 관한 한 큰형님의 결정에 토를 달지 않는 것이 오래된 불문율이기도 합니다. 큰형수가 이야기를 꺼냅니다. 어느 해 겨울, 어둠이 짙도록 저녁상이 들어오지 않아 사랑채에서 연신 헛기침만 하셨다는 할아버지 이야기를 들려주며, "사실, 어머님은 행장(行狀)이 좀 더디셨거든요. 그날따라 할아버지의 시장기를 더하게 하셨던가 봐요. 그리고 어느 날, 할아버지는 주방의 등불을 모두 감추어 버리셨대요"라고 말했다.

귀 기울여 듣고 있던 제관들의 웃음소리가 처마 밑 한밤의 고요를 담 너머 저만큼 밀어내는 것만 같았습니다. 장조카가 "왜요?" 하고 질문을 툭 던졌습니다. "왜긴, 부엌이 캄캄하면 어디 밥을 지을 수 있었겠나. 등불이 없으면 밝은 낮에 일찌감치 저녁밥을 짓게 될 거라고 믿으셨던 것이지 뭐."

그날도 예외 없이 할아버지의 저녁상은 어둑어둑 밤이 깊어진 뒤에야 마련되었답니다. 어머니는 다른 부엌 아궁이에 불을 가득 지펴 부엌을 환하게 밝힌 다음에야 저녁진지를 준비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시동생들을 배려하고 싶은 형수의 설득력 있는 일화에 형님이 눈감아 준듯합니다.

나는 어머니의 묵묵했던 효심이 어슴푸레 떠올랐습니다. 초등학교 시절, 나는 등교시간에 늘 쫓기곤 하였습니다. 마당가에 몰려들어 빨리 가자는 동무들의 채근에 한 길만큼 들떠 있던 나는 연신 부엌문을 들락거리곤 하였습니다. 그래도 어머니는 서두르거나 대충 끝내지를 않았습니다. 갖은 양념으로 간을 맞추고 무치는가 하면 기어이 뜸을 푹 들인 뒤에야 밥을 내놓으셨습니다.

3형제 중의 막내인 나는 어머니를 따라 밭일을 도울 때가 종종 있었습니다. 콩밭 매는 일은 특별했습니다. 여름 햇살에 후끈거리던 콩밭의 생흙냄새가 싫지도 않았고 건너 산자락에서 들려오는 비둘기 울음소리도 정겨웠습니다. 어머니와 콩밭 이랑에 눌러앉아 호미를 갈 듯이 부지런히 흙을 고르고 김을 뽑아내면서 나는 어머니를 앞질러 저만큼 앞서가고 어머니는 여전히 제자리에 머물러 계셨던 기억이 납니다.

한참 뒤에 살펴보니 어머니가 맨 콩밭이랑은 내 것과 눈에 띄도록 달랐었지요. 마치 호미 날이 바람을 맞고 지나간 것처럼 성글게 맨 나의 이랑과는 달리 어머니가 맨 밭이랑은 잡초 한 포기 없이 말갛더군요. 어린 콩 새싹이 자라기에 좋도록 흙을 고르기까지 하신 것은 물론이지요. 비록 더디긴 했으나 어머니가 지나간 곳은 확연히 표가 났습니다. 형수의 회고처럼 나의 어머니는 행장이 좀 뜨신 반면에 맘과 손길이 닿는 곳이면 늘 진정을 기울이셨던 것입니다. 속도는 더디되 정성을 다하여 그 질감을 우려내는, 오로지 성실로 한평생을 살다 가신 분입니다.

사실은 나도 행동거지가 그리 민첩하질 못합니다. 청년 시절, 사관생도 생활을 하였던 나는 연신 뒤처지기 일쑤였습니다. 굼뜬 탓이었습니다. 판형에 찍은 듯이 모두가 똑같은 프로그램에 따라 움직이는 생도들의 일과이지만 나는 번번이 때에 미치지 못하고 한발 늦곤 했습니다. 요즘도 어디론가 떠나려고 채비를 차릴 때면 꾸물대다가 결국 출발이 늦어질 때가 적잖습니다. 시간을 절용한다는 계산에 작업 중인 컴퓨터 앞을 때맞게 떠나지 못했기 때문이지요.

이즈음 나에게 한 가지 새로운 내력이 발견(?)되었습니다. 직장생활을 막 시작하는 아들을 두고 '저 봐라, 녀석도 좀 뜨네' 하는 모습을 은연중에 보게 됩니다. 내림일까요? 부모를 닮지 않는 자식이 어디 있겠어요. 그러나 잘난 것만 내림으로 삼고 못난 것은 학습된 것이라 여기렵니다. 나의 어머니는 나에게 느림이 아니라 무엇보다 소중한 정성을 물려주셨다고 믿습니다. 볼 수도, 만질 수도, 잴 수조차 없는 귀한 유산입니다. 할아버지께서도 내 어머니의 느림 속에 배어 있는 그 정성을 더 기특하게 보셨을 겁니다.

김정식/담나누미스토리텔링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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