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현수의 시와 함께] 기호의 고고학-김백겸

입력 2012-11-22 07:56:22

'태초에 빛이 있으라 하매 빛이 생겨났다'는 문장처럼 말씀과 사물이 한 몸이었던 행복한 시대의 말이 있었다

에덴으로부터 지상으로 내던져진 말들은 흙으로 돌아가야 하는 아담의 몸처럼 썩고 부서지는 낙엽의 운명이 되었다

말들이 인간의 의식에서 태어났으나 대양으로 흐르는 시간의 강에 뜬 물살의 거품이었다

말들은 심연으로부터 솟구친 바위 같은 세계풍경에 걸리며 인간의식에 굴곡과 무늬를 만들어냈다

아라베스크 문양의 회교 사원처럼

사각형과 원이 중첩된 티벳 만다라 그림처럼

말과 말이 결승문자처럼 얽힌 만화경이 문명이었다

말의 역사 속에서 상징의 피라미드, 은유의 크레타 미궁, 이미지의 알렉산드리아가 세워졌다가 무너졌다

인간의 생각들이 말의 요람에서 태어나 말들의 무덤에서 죽었다

제도와 법률과 화폐와 인간이 프로그램한 모든 도구들이 부장품처럼 묻혔다

인류의 의식은 흙의 잠 속에서 도서관의 책들과 박물관의 미이라 같은 말의 꿈을 꾼다

죽은 생각들이 진시황의 병마총처럼 묻혀 드라큘라의 수혈 같은 재생의 시간을 갈구한다

나는 독자들을 비경으로 안내하는 헤르메스처럼 지도와 랜턴을 준비해서 캄캄한 흙의 시간으로 내려가 문명의 모든 기억을 들여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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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중에는 서정적인 것을 다루는 시도 있지만, 철학적인 사색을 다루는 시도 있습니다. 세계나 삶의 본질에 대한 깊은 생각을 응축한 시는 어렵긴 하지만, 꼼꼼히 읽어보면 많은 생각거리를 얻어갈 수도 있습니다.

시인은 언어의 본질이란 무엇일까 사색하고 있습니다. 지상의 언어란 문명을 일으키는 대단한 도구이지만, 결국은 사라지고 마는 유한한 것입니다. 오로지 시인만이 흙속의 죽은 언어에서 기억을 발굴할 수 있으니, 시인이야말로 진정한 고고학자인 셈입니다.

시인'경북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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