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40 광장] 연말 풍경

입력 2012-11-20 11:05:11

최근에 낯선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동창생이라며 친근하면서도 반가운 어조로 나의 근황과 안부를 물었다. 나에 대해 비교적 상세히 알고 있는 상대방의 말에 깜짝 놀라자, 나와 가장 친한 친구의 이름을 대며 며칠 전에 통화했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너무 반가워서 이렇게 다시 전화를 한다는 것이다. 학교 다닐 때는 서로 주목하지 않은 사이였는데, 세월이 흐르니 다들 연락을 하는구나 싶고, 저렇게 선뜻 전화를 걸다니 주변머리가 모자란 나로서는 고맙기도 하였다.

어색한 맘을 지우면서도 한 번 만나자는 제안에 머뭇거리고 있는데, 전화선에서 흘러나오는 친구의 말인즉슨, 언론인 출신의 남편이 그 신문 계열사의 잡지사 대표로 있으니 잡지를 구독해달라는 거였다. 그러마고 대답을 하고 일단 전화를 끊었다. 연말이라 실적이 좀 필요하구나 싶어 문자로 일 년 구독료와 통장번호를 물었다. 답신을 받지 못한 상태에서, 나는 통화 중에 언급되었던 절친에게 전화를 걸었다. "누구야~, 별일 없지? 누구한테 전화왔던데…"라고 말을 하자마자, "그거 사기야…!"라는 고성이 들렸다. "아, 정말…?" 나는 말문이 콱 막혀, 가만히 있었고 그 사이 친구는 며칠 사이에 일어난 사건의 자초지종을 상세히 말해주었다. 말을 듣고 보니, 그 친구가 사기꾼이 되었는지 아니면 누군가가 그 친구를 사칭한 것인지 헷갈렸지만 아무튼 무엇인가 잘못되어 있었다. 그러나 설명을 다 듣고도 내심으로 믿어지지 않았다. "어째… 이를!" 이 말을 내뱉으면서 이것이 어떤 방식의 사기인지 감이 잡히지 않는 것이다.

어쨌든 구독 안내원의 전화가 왔고, 구독을 권하던 그 친구에게 문자가 한 차례 더 왔으며, 나는 "누구누구야, 우리 뭔가 확인 좀 하자"는 답문자를 보냈다. 그후 더 이상 아무런 연락이 없다. 그런데도 마음은 그저 다행스럽지만은 않았다. 그 아이가 정말 용기를 낸 전화였다면 어떡하나 하는 불편함이 가시지 않았다. 연말의 징조가 요즘은 '이런저런 실적'이라는 말을 통해 다가오지 않는가. 이 말에는 생계와 삶의 냄새가 묻어 있다.

이를 외면했다는 불편함은 아주 오래전, 사랑하던 나의 후배 모모의 모습을 상기시켰다. 다른 도시로 가서 성공해보겠다고 다짐한 그 후배는 매우 똑똑하고 상큼한 아이였다. 한동안 소식이 없다가 나타난 그 아이는 불안하고, 닳았고, 경박하고, 척박했다. 긴 한숨이 지나가는 자리가 그저 슬펐다. 틀리거나 실패하면 다시 시작할 곳을 찾아야 할 텐데, 후배는 그럴 겨를이 없어 보였고 무엇보다 틀리지 않았다고, 실패하지 않았다고 우기고 있었으며 점점 "사기꾼"이라고 불리는 아이가 되었다. 새삼 그 후배의 안부가 궁금해진다. 지금의 나 같았으면 그럼에도 한 번 더 만나자고 청을 했을 텐데, 그러지 못했다.

최근 어느 학자가 살아보려고 발버둥치는 자살자들의 절박한 신호와 그 의미를 분석해 발표했다. 자살하기 직전에 혹은 자살을 실행에 옮기면서도 세상에서 가장 절박한 신호, 살고자 하는 신호를 보낸다는 것이다. 이런 소리에 귀를 기울이자고 말한다면, 어떤 이들은 각자 자기를 위해 바쁘면서 무책임한 감상 아니냐며 힐난할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누군가는 들어주어야 하며 나아가 사회 시스템의 일환으로 해결책을 고민해 보아야 할 것 같다. 어느 날 문득 걸려온 전화나, 갑자기 나타난 지인들은 어쩌면 살아보려고 발버둥치는 어떤 신호를 보내는 것은 아닐지, 짠하다.

최근 나의 모친께서도 '어찌 이리 적막하냐'시며, 살 속 깊이 박힌 고독을 이탈한 오탈자처럼 뱉어내신다. 튀어나온 이 오탈자로 신호를 보내실 줄 아는 모친께 우선 감사하면서도, 나는 '우린 당신이 사시던 무대와는 다른 무대, 너무 빠르고 분주하며 치장을 강요받는 무대에 서게 되고, 자본의 시간에 시달리다가 대부분은 혼자 있고 싶어 한다'고 변명하려 한다. 그러나 눈 맞출 시간도 없다는 것은 자기애적인 변명에 불과하기에 곧 말을 접었다.

아무튼 삶 속에서 분출되는 긴박성의 징조에 대해 누군가는 대안이 없어도 들어주거나 알아주어야 하지 않나. 들어주는 이 자리는 어느 마을에 있다는 돌할매나 갓바위 부처님이나 어느 성당에 계신 성모님 앞에서처럼 자존을 위로받고 배려받는, '서로 함께'의 장소면 조금 더 훈훈할 것 같다.

남인숙/미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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