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정 화법의 역설, 소통 막힌 세상에 긍정의 싹이 되다

입력 2012-11-17 07:07:34

부정화법에 지치고 상처받은 마음을 치유해주는
부정화법에 지치고 상처받은 마음을 치유해주는 '힐링' 서적들.

"이번 대선 때 정치에 꼭 참여하고 싶수무니다." "여당에서?" "아니무니다." "야당에서?""아니무니다." "그럼 어디에서?" "납골당이무니다." "왜?" "사람이 아니무니다." (이달 11일 KBS2 개그콘서트 '멘붕스쿨' 코너에서 '갸루상'이 내뱉은 '아니무니다' 개그)

세상 모든 것을 무참히 '부정'(否定)하며 인기를 얻고 있는 개그 유행어인 '아니무니다'를 닮은 부정화법이 최근 대세다. 개그 코너를 비롯한 다양한 대중매체에서 눈과 귀를 집중시키는 표현법으로 사용되고 있다. 또한 일상생활 속에서도 부정화법은 처세의 목적으로 각광받는다. 그러면서 강한 부정화법의 반대편쯤에 부드러운 긍정화법도 나타나더니 퍼지고 있다.

◆'아니무니다' 부정의 해학

부정화법을 가장 많이 찾아볼 수 있는 곳은 TV 속 개그 코너다. 최근 화제를 모으고 있는 부정화법은 KBS2 TV 개그콘서트 '멘붕스쿨' 코너의 '갸루상'이 내뱉고 있는 '아니무니다'. 실제 화장을 짙게 한 일본의 일부 젊은 여성을 흉내 낸 우스꽝스러운 분장과 일본인이 어설프게 한국말을 구사하는 듯한 말투도 중요하지만 폭소의 핵심은 대사 그 자체에 있다. "일본에서 태어나지 않았으무니다." "한국에서 태어나지도 않았으무니다." 그러자 화가 난 담임 선생님이 "넌 도대체 어디에서 태어났니?"라고 묻는다. 갸루상은 "아예 태어나지 않았으무니다"라고 답한다. 상식과 논리에 맞지 않아 예측 불허인 부정화법의 연쇄 작용이 시청자로 하여금 저절로 폭소를 터뜨리게 하는 것.

이에 대해 갸루상을 연기하고 있는 개그맨 박성호 씨는 최근 한 언론 인터뷰에서 "부정화법을 통한 존재의 부정에서 즐거움, 기쁨, 해학이 나온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처음에는 의도하지 않았지만 코너를 진행하면서 개그 내용이 '우리 사회 소통의 부재'를 꼬집는 방향과 맞아떨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최근 방송에서 갸루상은 대선과 관련 정치 비판적인 뉘앙스로 '아니무니다'를 연발하며 폭소를 선사했고, 박수 세례도 받았다.

◆우리 사회를 투영하는 부정화법

부정화법을 사용하는 개그는 이전에도 꽤 있었다. 우리 사회상을 절묘하게 투영한다. 비상대책회의 도중 대책의 실행 여부에 대해 총책임자가 무조건 "안 돼"하며 딴죽을 건 다음 수다스럽게 조목조목 이유를 대는 한 개그 코너에 대해 직장인 김수현(33) 씨는 "무슨 일을 하든지 일단 딴죽을 걸고 보는 직장 상사와 닮았다. 조금이라도 자기 책임을 줄이려는 것이다. 겉으로는 '신중함'을 강조하는 듯하지만 실은 면피를 위해 잔머리를 굴리는 것이다. 개그 코너에서는 국가 지도자들을 비꼬았지만 실은 요즘 직장인들의 모습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한 어르신이 나타나 세상만사에 대해 "해봤자 뭐하겠노"라는 사투리 말투로 부정적인 대사를 반복하는 한 개그 코너에 대해 주부 황모(36'대구 북구 침산동) 씨는 "주변 어르신들의 말투를 그대로 따라한 것이라 재미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긍정보다는 부정적인 생각과 말투로 한숨만 내쉬며 삶의 재미를 제대로 누리지 못하는 어르신들이 주변에 많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요즘 노인 문제가 그렇지 않은가. 씁쓸하다"고 말했다.

사실 대부분의 개그는 알고 보면 '비하'란다. 방송인 김구라 씨는 자신의 저서 '웃겨야 산다'에서 "비하란 나를 깎아내리든가 아니면 남을 깎아내리든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부정화법의 일종"이라며 "자칫 비하 개그가 논란에 휩싸이면 비하를 당한 당사자나 네티즌의 항의가 빗발친다. 정치 풍자 등 비하 개그에 관용적인 외국과 달리 우리나라에서는 개그 하기가 참 만만찮다"고 말했다. 결국 김구라 씨는 과거에 인터넷 방송에서 했던 한 비하 발언이 문제가 돼 몇 달 전 방송계에서 잠정 은퇴하는 고초를 겪기도 했다.

개그에서 부정화법은 어느 정도 위험 부담을 떠안을 수밖에 없지만 다른 대중매체에서는 매력적인 표현법으로 활용되는 경우가 많다. 광고 문구가 대표적이다. '침대는 가구가 아닙니다. 과학입니다'라고 말한 한 침대 광고 문구는 지금도 유머로 패러디될 만큼 히트를 쳤다. 이에 대해 광고 전문가들은 "부정화법에는 상대방을 도발하는 매력이 있다"고 분석한다. 가구를 보여주며 가구가 아니라고 도발해 궁금증을 유발한 다음 '침대는 과학입니다'라는 문구를 강하게 각인시킨다는 것이다. '남들이 모두 Yes라고 말할 때 No라고 말하라'고 외치는 2000년대 초반 한 증권사 광고 문구도 인기를 얻었다. 문구 자체가 부정화법이라기보다는 '과감하게 부정화법 및 행동을 시도하라'는 일종의 캠페인성 슬로건으로 작용해 당시 '튀지 않는' 삶을 미덕으로 여기고 있던 사람들에게 어떤 '자극'을 줬다는 분석이다.

◆부정화법, 현대인의 처세 도구

부정화법은 단순히 '부정'을 표현하기보다는 상대방을 설득하는 처세의 화법으로 우리 일상생활에서 알게 모르게 쓰이고 있다.

사실 미디어를 통해 접하는 부정화법은 꽤 실용적이다. 직장인 오윤희(35'여'경북 안동시) 씨는 "예를 들면 청문회에서 고위 관료들은 불미스러운 의혹에 대해 '모른다' '기억이 나지 않는다' 등 부정화법으로 교묘하게 자신을 방어한다. 순순히 '수긍'했다가는 '손해'를 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일반인들도 생활 속에서 괜히 솔직함을 표현해 손해 볼 필요는 없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래서 말버릇도 중요한데 주변 사람들의 부탁에 대해 "네네~" "괜찮습니다"라며 쉽게 수락하는 '예스(Yes)맨' 식의 행동은 곧장 후회와 피곤함으로 이어진단다. 그러면서 상대방의 부탁에 대해 당당하게 'No'라고 대답하는 '거절의 기술'이 각종 실용서적을 통해 보급되고 있다. 일리가 있는 No는 자기 평판을 떨어뜨리지 않지만 Yes를 거듭한다고 해서 평판이 좋아지는 것도 아니란다. 따라서 간단하고 명확하게 거부 의사를 표현할 것, 그러면서 상대가 상처받지 않도록 기술적으로 No를 구사할 것 등이 거절 기술의 핵심이다. 성공하고 싶은 현대인들은 보다 '세련된' 부정화법을 구사하라는 얘기다.

◆부정에 지친 세상을 '힐링'하라

일상생활 속에서 부정화법을 구사하는 것은 꽤 피곤한 일이다.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말을 '처세' 혹은 '생존'을 위해 내뱉는 것이기 때문. 그러자 부정화법의 반대편쯤에 긍정화법도 나타나고 있다. 그런데 그냥 긍정이 아닌 '부드러운' 긍정의 말들이다. 최근 대중매체 속에 많이 등장하고 있다. 일명 '힐링'(마음의 치유) 트렌드다.

가장 많이 찾아볼 수 있는 긍정화법 표현은 '괜찮아'다. 법륜 스님의 '방황해도 괜찮아' 김별아 작가의 '죽도록 사랑해도 괜찮아' 등 최근 몇 년간 '괜찮아'류 서적이 다양하게 쏟아져 나왔다. 책들은 대체로 위로, 고민 상담, 심리 치유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이외에도 김난도 교수의 '아프니까 청춘이다', 공지영 작가의 '사랑은 상처를 허락하는 것이다' 등 인생에 대해 '그러려니'하고 긍정하는 표현의 책 제목 및 내용이 호응을 얻으며 베스트셀러의 공식도 되고 있다.

이처럼 대중매체 속에서 '강한 부정'과 '부드러운 긍정'이 대치 및 공존을 이루는 상황에 대해 허미옥 참언론시민연대 사무국장은 "현대인들은 겉으로는 날카로운 발톱과 같은 강한 부정화법을 나타내며 처세와 생존에 골몰하지만 그러고 나면 허무함을 느끼게 마련이다. 결국 빈 마음 한구석을 부드러운 긍정의 말로 채우려 한다. 이러한 현대인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힐링' 등 부드러운 긍정화법이 대중매체 속에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다"며 "부정화법과 긍정화법은 같은 시대에 긴밀한 관계 속에서 서로 지분을 나눠 갖는다"고 분석했다.

황희진기자 hhj@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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