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춘추] 어느 날의 묘지

입력 2012-11-13 07:06:09

토성의 고리는 적도 둘레를 원형궤도에 따라 공전하는 얼음결정과 유성체의 작은 입자들로 구성되어 있는 것으로 짐작된다고 한다. 또한 과거에는 토성의 달이었던 것이 행성에 너무 가까이 위치하여 그 기조력으로 파괴된 파편들인 것으로 짐작된다고도 한다.

프랑스 천문학자 로슈(Roche)는 위성이 모행성의 기조력에 부서지지 않고 접근할 수 있는 한계거리를 처음으로 계산해 그것을 '로슈 한계'라 이름 붙였다.

W. G. 제발트의 소설 '토성의 고리'를 읽는 동안 내겐 그 토성의 고리처럼 굽어드는 길을 마주하게 된 즐거움이 있었다.

우연히 접어들게 된 집 근처 야산, 일봉(一峰)의 외딴 무덤들이 이 산책로 대목 대목에 기구한 개인사를 품은 듯 자리 잡고 있었다. 그 중 사초(莎草)가 한 뼘 정도 올라오기 시작한 그 무덤으로 가는 길은 아닌 게 아니라 정말 토성의 띠 같았다. 그 굴곡은 부드럽고도 강하게 내 발길을 끌어당겼던 것이다. 나는 바로 그 무덤을 하나의 모행성으로 간주하고, 때마침 읽고 있던 책과 연관하여 이런저런 생각의 놀이를 하고 있었던 듯하다.

사실 처음엔 그 무덤을 두고 돌아드는 길이, 삶과 죽음이 만들어내는 그 거리가 나를 사로잡았지만 그보다 그 사잇길에서 할미꽃 군락을 발견한 반가움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절망, 고독으로 뭉쳐져 빛나는 먼지 덩어리를 안고 쏘다녔다는 기분이 들 때, 그로 인해 부서지고 싶도록 자신을 부여안은 고통과 환희로 문득 멈춰설 때, 그때가 나에겐 일몰의 시간인 것이다. 바로 그때 수십 송이의 할미꽃이 땅을 뚫고 올라온 경이와 마주하게 된 것이다. 그 포기 포기마다 응축된 생명력의 자태가 새삼 놀라웠다. 그날 할미꽃의 그 자주(紫朱)는 내가 숨겨놓고 찾아가 보아도 좋을 열정의 빛이 아니었을까.

"고개를 들어보렴, 귀 바퀴 솜털 많은 그대여." 나는 무릎 꿇고 꽃을 들여다보면서 다만 한 생을 살다간 어떤 이에게 깊은 절을 올리는 자세가 되었다. 나도 할미꽃 줄기가 된 셈이다. 산 자의 핏빛 같은 꽃, 그 꽃에 어른거리는 삶의 그림자를 쓰다듬어 보게 되었다.

그 계절, 일봉의 그 무덤 언저리를 돌고 또 돌았다. 저녁노을을 받고 있는 무덤 쪽으로 산 자들의 발자국이 늘 기웃거린다. 그렇듯 살아 거니는 이들은 죽음의 집으로 무심코 이끌려 다가온 것.

그 길에서 할미꽃씨가 날아오르는 날, 삶과 죽음은 한 몸이었고, 또한 한 몸이 되길 간절히 원하였으며, 서로를 끝없이 끌어당기며 견디고 있는 것이라 생각해 보았다.

석미화<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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