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사만어] 전태일 분신 42주년

입력 2012-11-13 07:25:59

불의의 화재사도 그렇지만, 특정인들이 의도한 바를 관철시키기 위해 택하는 분신은 죽은 당사자에게는 물론 살아남은 자에게도 고통스런 기억을 오래 남긴다. 극심한 고통을 넘어서서 지키고 싶은 그 무엇을 위해 분신을 택한 대표적인 케이스가 1970년 11월 13일에 터진 전태일 분신사이다. 42년 전 오늘, 전태일은 서울 청계천 평화시장 앞 거리에서 몸에 석유를 뿌리고 불을 질렀다.

시뻘건 화마가 자신을 삼켜도 전태일은 살아 있는 정신으로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일요일은 쉬게 하라"며 근로기준법 준수를 외쳤다. 죽음으로부터의 외침이자, 산업화에 착취당하는 노동자를 위한 소신공양이었다.

전태일의 분신항거는 1970년대 한국사회를 보여주는 상징이다. 당시 평화시장에는 1천여 개의 영세한 봉제공장에 10대를 포함한 2만7천여 명이 하루 15, 16시간의 중노동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들이 일하는 곳은 제대로 허리를 펴지도 못하는 다락방이었다.

좁아터진 다락방에는 한 입이라도 덜어야 먹고살 수 있는 가난한 가족과 '수출만이 살길'이라고 목메는 나라를 위해 하루종일 돌아가는 미싱 소리에 청춘을 바친 여공들의 비참한 현실이 묻어났다. 이런 현실이 전태일의 앞을 가로막았다.

1948년 대구 남산동에서 태어나 상경한 뒤 남대문초등학교를 졸업하고 평화시장 견습공으로 일을 시작한 전태일은 인간 이하의 노동조건에서 절망보다는 투쟁을 택했고, 동료들과 함께 바보회를 만들어 적극적인 개선책을 시도했지만 해고당했다.

당시 바보회는 넘쳐나는 일거리를 주문받은 평화시장 피복상들이 납기일을 맞추려고 사흘밤낮 잠을 재우지 않고 일을 시키거나 잠이 오지 않는 약을 먹이는 인권유린까지 캐냈지만 언론으로부터 외면당했고, 지식인들에게는 배척당했다. 탈출구가 막힌 상태에서 전태일은 죽음으로 항거했고, 한국 노동운동의 불씨는 지펴졌다.

11일 비가 내리면서 바람까지 불어댄 서울역 앞 광장에는 청계천 6가 전태일 다리로부터 집결하여 행진해 온 수많은 노동자들이 모여 소리치고 있었다. 이 시대의 전태일이라고도 할 수 있는 수백만 비정규직의 아픔에 귀 기울여달라고.

영국 사회가 중산층의 양보와 인내로 노동자를 포함한 사회적 약자층의 얘기에 귀 기울여서 선진민주사회를 이루어냈듯, 이제 한국사회도 전태일의 후예라고 할 수 있는 비정규직과 함께 더불어 살아갈 방법을 생각할 때가 됐다.

최신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