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을 요리하는 의사] 당신이 남긴 아름다운 이야기들

입력 2012-11-12 07:29:17

뻔한 이야기다. 실화라는 것만 빼면 소설이나 영화의 애틋한 사랑 이야기와 흡사했다. 남자는 첫 결혼에 실패하고 알코올 중독자가 돼 치료 중이었고, 여자는 윌슨병(구리의 대사장애로 간경화와 신경증상이 있는 유전병)으로 정신장애 3급이 돼 남자와 같은 정신병원에 입원했다. 그들은 22년이나 나이 차가 났지만, 결혼식을 올렸다.

수년간 버려졌던 남자의 아이들도 고아원에서 데려와 새 가정을 꾸렸다. 여자의 부모는 반대를 했지만 딸이 워낙 좋아하니 어쩔 수가 없었다. 그는 말도 어둔하고 걷는 것도 불편한 그녀를 여인으로 봐주는 세상의 유일한 남자였다. 아이들은 모든 것이 부족한 새엄마였지만 행복했다. 그러나 신은 그들의 편이 아니었다.

결혼해서 10년쯤 지나자 남자의 혀에 암이 왔다. 목 뒤에 사과만 한 혹이 툭 불거지면서 물 한 모금도 삼킬 수 없을 지경이 되자 호스피스 병동으로 입원했다. 사위가 말기암이라는 것을 알고서 여자의 부모는 '왜 그때 결혼을 허락했을까?'하며 가슴을 쳤다. 자신의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딸이 말기암 환자를 간병하는 것도 마음 아팠다.

환자도 환자였지만 그가 떠나고 혼자 남겨질 부인이 진실로 걱정이다. 장애인 연금이 나오기는 하지만 누군가가 경제적으로도 신체적으로도 그녀와 함께해야 했다. 그렇다고 다시 친정으로 돌아갈 수도 없고, 안 갈 수도 없지 않은가.

대학교 2학년인 그녀의 의붓아들에게 짐을 지워 줄 수는 없다. 그래도 용기를 내어 아빠가 떠나고 새엄마와 어떻게 할 것인지 넌지시 물어보니, 자기보다 11살 많은 정신장애 3급인 새엄마와 함께 살 것이라고 다부지게 말한다.

인생을 성공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서로가 병든 몸으로 병원에서 만나 사랑을 하고 결혼까지 했지만 이제는 영원한 이별을 준비 중이라는 사연은 아름답고 감동스럽기는 하다. 그러나 한결같이 암을 극복하지 못하고 죽음에 이르는 뻔한 이야기다.

그런데 나는 매번 새로운 이야기를 만나듯이 환자의 사연에 빠져든다. 이유가 무엇일까? 그들의 이야기에는 상투적인 사생활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죽음 뒤에도 변하지 않는 삶의 진정한 가치관들, 이를테면 사랑, 우정, 배려, 용서 등을 우리의 내면에서 끄집어내어 주기 때문이다. 환자들은 많은 펀치를 맞은 지쳐버린 복서처럼 만신창이가 된 채 입원하지만, 그들이 남긴 아름다운 이야기는 따분하고 재미없는 우리의 일상을 다시 한 번 새롭게 곱씹어 보게 한다.

이렇게 내가 삼킨 죽음은 나를 변화시켰다. 전업주부에서 호스피스 의사로, 책 읽는 여자에서 글 쓰는 작가로 바꾸었다. 항상 현재의 삶에 만족하지 못했던 내게 오늘이 가장 행복한 인생의 터널을 통과하는 그 순간이라는 것도 알게 했다.

김여환 대구의료원 호스피스'완화의료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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