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순의 가요 이야기] 김용환(상)

입력 2012-11-08 14:17:25

명문 음악가 집안…가창·작곡은 물론 연극서도 재능

하늘은 인간에게 많은 재주를 베풀어주었지만 대개 한 가지 부문에만 특별한 솜씨를 주셨지요. 그런데 이 음악 판에서 혼자 각양각색의 다양한 재능을 한몸에 지니고 종횡무진 바람 찬 세월을 앞장서 헤쳐 갔던 대중음악인이 있었습니다. 한국 가요사 전체를 통틀어 작사'작곡과 노래를 겸했던 만능 대중음악인은 그리 흔하지 않습니다. 우선 당장 손꼽을 수 있는 인물로는 천재음악가 김해송(金海松) 정도가 있겠지요.

여기에다 한 사람을 더 들라면 우리는 주저하지 않고 김용환(金龍煥'1909∼1949)의 이름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그들의 공통적인 면은 하나같이 뛰어난 독보성을 지녔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오늘 한국 가요사에서 매우 귀한 천재음악가였던 김용환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자 합니다.

뛰어난 가수이자, 작곡가이자 만능 대중음악인으로서의 재주를 유감없이 발휘했던 김용환은 1909년 함경남도 원산에서 출생했습니다. 기독교 집안이었으므로 예수의 제자 요한의 이름을 따서 용환이 되었습니다. 그의 다른 형제들로는 가수로 출세했던 아우 김정구, 피아니스트였던 아우 김정현, 소프라노 가수였던 누이동생 김안라 등 원산의 출중한 음악가 집안이었습니다. 여기에다 김용환의 아내 정재덕 또한 원산 출생으로 가수가 되었으므로 가히 명문 음악가 집안이라 할 만하지요.

작곡과 가창은 물론이요, 연극배우로서의 재능을 뽐내기도 했고, 온갖 악기 연주에 통하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고 합니다. 노래는 언제나 툭 트인 목소리로 능청스럽고도 시원시원한 창법으로 불렀습니다. 체격은 남성적 풍모에 완강한 느낌을 주었습니다. 원래 김용환은 원산 지역의 동방예술단(조선연극공장)에서 연극배우로 출발했습니다. 작곡가로서 맨 처음 데뷔한 것은 조선일보의 가사 모집에서 신민요 '두만강 뱃사공'이 당선되고부터입니다. 이 경력이 바탕이 되어 1932년 근대식 레코드회사들의 조선 진출에 따라 서울의 포리돌레코드사에서 전속작곡가 겸 가수로 활동하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노래 이름만 들어도 그 시절이 기억되는 '구십리 고개' '노다지 타령' '모던 관상쟁이' '낙화유수 호텔' 등의 노래가 바로 김용환이 히트시킨 작품들입니다. 김용환의 노래를 귀 기울여 가만히 듣노라면 마치 판소리를 부르는 가객의 걸쭉한 창법에 서민적인 삶의 구수한 향취가 느껴집니다. 뭐랄까, 민중적 넉살이랄까요? 그 넉살도 바탕에 따뜻한 슬픔과 연민이 깔려 있는 여유로움의 과시이지요. 나라의 주권이 이민족에게 빼앗겨 유린과 압박을 당하던 시기에 이러한 창법의 효과는 우리 민족의 고유한 전통성을 지켜내는 일에 자연스러운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김용환의 또 다른 재능으로는 뛰어난 신진 가수를 발굴하는 남다른 재주와 안목을 갖추었다는 점입니다. 그 대표적인 성과가 가수 이화자의 발굴입니다. 1935년 여름, 김용환은 경기도 부평의 어느 술집에 노래 잘 부르는 여자가 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곧바로 찾아가서 실력을 테스트했다고 합니다. 그녀가 부르는 기막힌 '노랫가락'을 듣고 발탁하여 오랫동안 연습을 시킨 다음, 마침내 오케레코드사를 통해 '꼴망태 목동'과 '님전 화풀이'로 큰 성공을 거두게 합니다. 물론 김용환이 김영파란 예명으로 곡을 만들어 이화자에게 주었지요, 1939년은 김용환에게 있어서 최고의 해였습니다. '어머님전 상서'(조명암 작사'김영파 작곡'이화자 노래)가 발표되었기 때문입니다.

영남대 국문학과 교수

최신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