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소리의 세계를 꽃피웠던 가야금의 창시자 우륵. 왕산악, 박연 등과 함께 우리나라 3대 악성으로 불리는 그에 대한 평가는 역사를 읽는 사람이나 학자들마다 제각각 다르다. 우륵은 시류에 영합해 지조를 잃은 가야의 배신자일까. 아니면 세상의 오해와 능멸을 감내하면서 오로지 음악만을 위해 가야를 버리고 신라를 선택한 것인가. 사람들의 평가가 어떠하든 분명한 것은 우륵이 만든 가야의 음악과 악기가 오늘날까지 우리 곁에 남아 있다는 사실이다.
◆가야의 개방성 보여주는 가야금곡
악사(樂師)였던 우륵은 대가야 가실왕의 명령으로 가야금 12곡을 만들었다. 12곡은 '하가라도'(下加羅都), '상가라도'(上加羅都), '보기'(寶伎), '달이'(達已), '사물'(思勿), '물혜'(勿慧), '상기물'(上奇勿), '하기물'(下奇勿), '사자기'(獅子伎), '거열'(居烈), '사팔혜'(沙八兮), '이사'(爾赦) 등이다. 사자기와 보기를 제외한 10곡은 당시 지명을 그대로 사용한 것으로 후기 가야에 해당하는 여러 나라의 음악을 정리해 가야금곡으로 편곡한 것으로 추정된다. 사자기와 보기는 중국에서 건너온 가야금곡이다. 사자기는 사자 가면을 쓰고 불교 사원의 장례나 법회 때 추는 춤으로 당시 가야 지역에 불교가 수용됐음을 짐작게 한다. 보기는 금색 공을 가지고 노는 일종의 곡예로, 서역에서 중국을 거쳐 가야에 전해진 것으로 보인다. 이 두 곡을 통해 가야의 개방성과 국제교류관계를 가늠할 수 있다. 또 우륵이 이 같은 외래문화를 받아들여 가야금곡으로 만들었다는 사실은 그가 단순히 악기를 다루는 기능인이 아니라 음악에 대한 학문적'기술적 전문지식을 갖췄음을 의미한다. 또한 불교의식에 대한 이해의 폭도 넓었을 것으로 보인다.
◆화합과 개혁의 상징, 가야금
우륵은 20대 후반에 가실왕의 부름을 받고 대가야의 도성으로 들어갔다. 이 당시 대가야는 고대국가 단계로 발전하면서 지금의 경남 지역과 전라도 여수, 순천에 이르는 광범위한 권역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러나 백제가 대가야 지역으로 진출하면서 섬진강 상류인 남원과 하류인 하동을 빼앗겼다. 백제의 진출을 막기 위해 성을 축조하고 신라와 결혼동맹을 맺었지만 이 같은 노력은 모두 실패로 돌아갔을 뿐 아니라 오히려 신라까지 가야지역을 침범해 김해의 가락국과 창원의 탁순국 등이 신라에 의해 멸망했다. 위기에 직면한 대가야는 자구책 마련이 절실했다.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군대를 늘리거나 성을 쌓는 일이 시급했음에도 가실왕은 우륵에게 가야금을 만들고 작곡하게 했다.
왜 가야금이었을까. 삼국사기 악지(樂志)는 '가야국 가실왕이 중국의 악기를 참조해 가야금을 만들었는데, 가야 여러 나라의 방언이 각각 달라 소리음(聲音)을 하나로 통일하기 위해 성열현(省熱縣) 출신의 악사(樂師) 우륵에게 명하여 가야금곡 12곡을 작곡하게 하였다'고 전한다. 음악을 통해 나라를 하나로 통합하기 위해 가야금 12곡을 만든 것이다.
가야금은 오동나무 공명반에 명주실로 12개의 현을 만들었다. 위 판은 둥글고 아래 판은 평평한데 둥근 하늘과 평평한 땅을 본뜬 것이다. 아래위 사이가 비어 있는 것은 하늘과 땅 사이의 빈 공간을 의미하며, 12줄은 일 년 열두 달을 뜻한다. 안쪽 높이가 세치(三寸)인 것은 천'지'인을 상징한다. 이처럼 가야금에는 대가야 사람들의 우주관과 시간관이 담겨 있다. 하늘과 땅, 그 사이에 가야금을 연주하는 사람이 이루는 조화와 균형이 가야금의 선율이 되는 셈이다. 고대사회에서 음악을 통한 통치는 '형정예악'(刑政禮樂)이라는 표현처럼 유학(儒學)에서 국가와 사회를 다스리는 가장 높은 단계를 의미한다. 요즘 음악과 의미가 전혀 다른 셈이다. 가실왕과 우륵은 유교적인 예악(禮樂) 사상을 가야금에 투영해 대가야 권역에 속한 각 나라를 하나로 통합하고 정치적인 개혁을 이루고자 했던 것이다. 가야금은 단순히 음악을 연주하는 악기가 아니라 대가야의 화합과 개혁을 추구하는 개혁정치의 상징물로 만든 것이다. 가실왕과 우륵은 가야금 12곡을 통해 흩어진 지역을 포용하는 '범대가야연합'을 추구했다. 지역 통합과 정치적 개혁을 통해 기울어져 가는 국가를 재건하려는 노력이었다.
◆우륵의 고향 둘러싼 논란, 경북 고령 VS 경남 의령
삼국사기에는 우륵이 490년 무렵 대가야 성열현(省熱縣)에서 태어났다고 기록돼 있다. 하지만 성열현이 현재 정확히 어느 지역인지는 학자들 간에 의견이 분분하다. 고령을 비롯해 대구 동구와 경남 의령, 거창, 충북 제천 등 여러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최근에는 성열현이 고령군 내 한 곳으로 보는 학자들 수가 늘어나는 추세다. 그곳이 어디가 됐던 분명한 것은 우륵이 가실왕의 명을 받아 가야금을 창제한 대가야 인물이라는 점이다.
대가야의 가실왕이 성열현에 살던 우륵을 왕도로 불러들인 것을 보면 성열현은 대가야 왕의 통치력이 미친 곳임은 분명해 보인다. 만약 성열현이 의령'거창이라면 대가야가 그곳까지 지배력을 행사했고, 대구나 충북이라면 대가야의 지배력이 더 넓은 범위까지 확대됐다고 볼 수 있다. 이 같은 논리로 보면 우륵의 고향이 어디인가에 따라 대가야의 직접적인 지배권역이 바뀔 수 있다.
그런데 최근 사학자 김태식 홍익대 교수가 "경남 의령군 부림면이 성열현일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해 주목을 받고 있다. 그는 삼국사기 권41 열전 김유신전 상권에 나오는 '성열성'이라는 지명이 성열현과 유사하다고 주장했다. 또 "기록에 나오는 가혜성(加兮成)과 성열성(省熱成), 동화성(同火成) 등 7개 성은 562년 대가야 멸망으로 신라 영토가 됐다. 642년 백제 의자왕의 대야성(합천) 공략 이후 40여 개 성이 함락됐을 때 백제영토가 됐으나 2년 후인 644년에 반격해 이 일곱 성을 회복해 옛 가야 지역을 탈환했다"고 덧붙였다. "성열성과 성열현이 같은 지명일 가능성이 높다"는 주장과 "성열현은 가야금을 제작할 수 있을 정도의 우수한 문화적 역량을 갖췄으며 왕명이 직접 관철되는 대가야의 도읍인 고령 인근 지역"이라는 주장이 팽팽하게 맞서는 형국이다.
◆가야와 신라,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이방인 우륵
가실왕과 우륵의 개혁 정치는 대가야 내부세력의 반발과 신라의 영토 확장 욕구 등과 맞물려 점차 동력을 상실했다. 532년 금관가야가 멸망하면서 가야를 지탱하던 대가야에 대한 신라의 공세가 더욱 강해졌다. 대가야 내부에서는 친백제파와 친신라파로 갈라져 내홍에 휩싸였고, 우륵은 친신라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다.
외교정책을 두고 양측 세력 간 대립이 격화되면서 친백제세력이 주도권을 장악하자 540년대 후반 우륵은 가야금을 품에 안고 신라로 망명했다. 그러나 그의 행로는 순탄치 못했다. 신라의 도읍지인 경주로 갔지만 그곳에 머물지 못하고 당시 백제, 고구려, 신라의 대치가 극심했던 변방의 국경지대인 충주 지역으로 보내졌다. 이곳에서 우륵은 진흥왕이 보낸 계고(階古), 법지(法知), 만덕(萬德) 등 신라인 제자들에게 음악과 춤, 노래 등을 가르치며 진흥왕의 관심을 받게 됐다.
그 덕분에 우륵은 다시 경주로 돌아왔지만 신라 지배층으로는 대우받지 못했다. 신라나 진흥왕은 대가야의 개혁을 추진하기 위해 작곡했던 우륵의 가야금 12곡을 수용하지 않고 3명의 신라인 제자들을 통해 12곡을 5곡으로 줄여 새롭게 편곡했다. 신라적으로 변용된 가야금곡이 대가야를 멸망시킨 진흥왕에 의해 신라의 대악(大樂)으로 정착하게 된 것이다. 우륵의 정치적 망명은 성공적이었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음악가로서 우륵의 선택은 성공적인 것으로 보인다. 우륵은 562년 대가야의 멸망을 직접 목격한 후 560년대 전반기에 생을 마감했다. 우륵은 대가야 사람이었지만 온전한 가야인으로 생을 마감하지 못했다. 또 정치'외교적으로 친신라 노선을 견지해 신라 망명을 선택했지만 신라인으로 제대로 활동하지도 못했다. 이런 점에서 우륵은 대가야와 신라 양쪽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삶을 살았다. 그러나 우륵이 만든 가야금은 오늘날까지 이어져 그가 끝내 이루지 못한 꿈을 연주하고 있다.
◆모양'소리는 달라져도 정신은 살아있어
고려시대 가야금은 신라의 전통을 이어받아 궁중에서 향악의 연주에 쓰였다. 거문고, 비파와 함께 향악의 현악기로 궁중의 다양한 현향악과 제례악 연주에 없어서는 안 될 악기였다. 궁중에서 전문 악공들이 연주를 했고, 고위관리와 문인들도 가야금의 풍류를 즐겼다. 고려시대 많은 문인들은 자신의 인격 수양을 위해 가야금을 중시했다. 자신들이 직접 연주하거나 집안에 가야금을 연주하는 예기(藝妓)를 두기도 했다. 이규보의 문집인 '동국이상국집'에 따르면 "벼슬에서 물러난 이규보는 문인 박학사의 도움으로 가야금을 배워 연주하고, 박학사 역시 가야금을 탄 것은 물론 집안에 기생을 두어 노래를 부르게 하면서 반주를 했다"고 전한다. 이규보는 손톱이 빠져도 가야금을 탔을 정도로 가야금을 사랑했다.
'세종실록'과 '악학궤범'에는 조선시대 가야금이 화려한 금박무늬를 붙였으며 일본 정창원에 전하는 신라금과 흡사했다고 전한다. 연산군 때는 한꺼번에 가야금 40대를 만들고 모두 침향과 순금으로 장식하게 해 호화로움이 극에 달했다. 조선후기까지 음악은 대부분 가'무'악이 종합된 형태로 연주됐다.
근대 이후 서양문화가 유입되면서 가야금도 변화의 흐름을 탔다. 19세기 후반 탄생한 '가야금산조(散調)'는 기악 독주라는 새로운 음악 형식에 우리 음악의 특징인 즉흥성과 다양성을 담았다. 가야금산조를 처음 만든 김창조의 산조가락은 다음 세대로 전해지면서 연주자마다 가락이 조금씩 달라지며 12개 유파가 형성됐다.
근대 산조음악 연주를 위해 '산조가야금'도 제작됐다. 기존의 풍류 가야금보다 폭이 좁고 길이가 짧아 빠른 음악을 연주하기에 적합하고, 들고 다니기에 간편해 우리 근대음악의 흐름을 혁명적으로 바꿔 놓았다. 이 같은 가야금 변화는 남'북한에서 동시에 일어났다. 1960년대 초부터 연주 공간의 변화와 새로운 창작음악의 출현은 기존 가야금의 변화를 촉구했고, 철가야금과 13현'15현 가야금 등이 등장했다.
1980년대 들면서 변화의 진폭은 더욱 가팔랐다. 21현'22현'17현'25현의 가야금과 저음'중음'고음 가야금 등 악기의 줄 수, 줄의 재료, 악기의 크기 등에 변화를 준 현대의 가야금들이 다양하게 출현했다. 이 밖에도 연주자세도 바닥에 앉아서 연주하던 전통방식에서 의자에 앉아 연주하는 방식으로 변화했다. 또 5음계의 전통음악 연주뿐 아니라 7음계인 서양음악 연주까지 할 수 있도록 변모했다. 북한에서도 다양한 개량을 시도했다. 현재 북한은 21현 가야금을 일반적으로 사용하며, 서양의 하프처럼 생긴 전통악기 와공후를 가야금처럼 눕혀놓고 연주할 수 있도록 한 '옥류금'을 만들었다. 구슬이 굴러가는 소리를 낸다는 옥류금은 33줄의 특수 나일론 줄에 간단한 조 옮김 장치와 페달 장치가 부착됐다. 모습은 달라지고 있지만 가야금이 탄생한 지 1천500년을 훌쩍 넘긴 지금도 가실왕의 음악 정신은 살아 숨쉬고 있다.
고령'정창구기자 jungc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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