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춘추] 아름다운 엔딩

입력 2012-11-07 07:46:01

때론 '나에게만 의미 있는 책'이 있다. 책을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서는 그러한 '소소한' 책들이 출판의 형태를 갖추는 게 맞을까 하는 현실적인 고민이 들 때도 있지만, 한편으론 책이 꼭 다수의 타인을 상대로 만들어져야 하는가 싶기도 하다.

어느 맑은 봄날 오후. 어르신 손님 한 분이 방문하셨다. 평생을 여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쳐오셨다는 그분은 정년퇴임을 한 후로 주변의 흩어진 삶의 흔적들을 정리하고 있다며 준비해 오신 원고를 내밀었다.

"사람은 앞을 바라보며 살아야 한다는 말이 위안이 되었는데 지금은 내다볼 앞날이 없어 허전하다…." 이제는 빛이 바랜, 손자 손녀의 고사리 같은 손으로 썼음 직한 종이 편지와 사진, 손자들에게 보내는 할아버지의 편지, 아이들과 산책길에서 찾은 돌멩이, 숲 속 벌레의 추억까지 담긴 원고였다.

우리는 같은 계절 속에서도 다른 날씨를 경험하고, 다른 느낌을 맛보면서 산다. 또 매일 걸어다니는 산책로에서 발견할 수 있는 자연스러운 것에도, 누군가는 주목하고 발걸음을 멈춘다. 어쩌면 방치될 수도 있었던 기억들이 할아버지의 뭉툭한 손끝을 통해 소중하게 다시 태어나고 있었다.

그 비슷한 시기에 또 한 묶음의 반가운 텍스트가 도착했다.

한국땅에서 한센인들을 위해 평생을 봉사해 온 독일인 수도자 고(故) 디오메데스 메펠트 수녀님에 대한 글이었다. 그분에게 은혜를 입은 이들이, 보은하는 마음과 그들의 2세들에게 수녀님의 숭고한 사랑이 오래도록 기억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책을 발간코자 했다.

몸과 마음의 아픔이 돌처럼 굳어 있던 사람들에게 찾아온 디오메데스 수녀님은 그들에게 별처럼 빛나고 높은 존재였다. 그리고 한 수도자로서 수녀님에게는 그들과의 생활이 또 하나의 성소(聖所)였다. 파란 눈의 수녀님이 찾아준 세상의 공기와 바람과 꿈. 그들의 언어 하나하나에는 진심 어린 감사와 존경이 배어 있었다.

시간이 흐르고 두 원고가 각각 책으로 출판되었다. 자식들과 손자들에게 귀하고 소중한 인생을 가르쳐 온 어르신은 추억이 없는 그들에게 아름다운 추억이 될 책을 선물하셨다. 그리고 한 수도자의 숭고한 사랑에 화답하고자 했던 사람들은 그들만의 소박하고 의미 있는 출판 기념식을 가졌다. 나는 그날 다시 그 마을에 오신 디오메데스 메펠트 수녀님을 보았던 것 같다.

내가 기억하는 아름다운 엔딩이다.

누군가는 쓰고, 누군가는 읽는다. 그리고 누군가는 그 무엇과 조우한다.

진심이 담긴 글에는 특유의 힘이 있다. 그 힘이 작용하는 책은, 비단 그것이 '나에게만 의미 있는 책'이라 할지라도 출판의 본질을 흔들지는 않으리란 생각이다.

나 윤 희 출판편집디자인회사 홍익포럼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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