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감문국 축제 '빗내농악' 지금도 개령 일대서 전승
"얼씨구, 얼씨구 좋다. 잘한다. 케갱 케갱 캥 케갱~갱."
날씨가 제법 쌀쌀해져 옷깃을 여미게 하는 10월 중순 가을 밤. 김천 삼락동 스포츠타운 주차장에선 신명나는 풍물놀이 '판'이 흥겹게 펼쳐졌다. 황악산 자락 김천에서 한국민속예술축제가 4일 동안 열리고 있다. 이날은 김천의 '빗내농악' 완판 공연이 열리는 날이다. 경북 무형문화재 제8호인 김천 빗내농악은 지난해 한국민속예술축제에서 대상인 대통령상을 수상했다.
김천(옛날 금릉) 개령지방에 전승되어 온 빗내농악은 잊힌 왕국 감문국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때는 삼한시대. 개령들 유동산 아래 진대골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당고산에 매달아 놓은 북이 울리면 양쪽으로 도열한 군사들이 밀었다가 당기고 에워싸는 형상을 반복한다. 고된 훈련이 모두 끝나면 군사들이 음식을 나눠 먹으면서 조금 전 익혔던 것을 연습한다. 지치면 징과 꽹과리, 북을 두드리고 덩실덩실 춤을 추며 고된 일상을 마무리한다. 오늘날 빗내농악의 기원은 감문국 병사들의 훈련과 전투과정에 그 뿌리가 있다. 여기다 '나라 제사'와 풍년을 기원하는 '빗신제'가 혼합하여 동제(洞祭) 형태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농악은 모두 열두 마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빗내농악 넷째 마당인 '영풍굿'은 병사들의 훈련을 의미하는데 쇠잡이들이 원진 안에서 놀다 상쇠의 신호에 따라 앞으로 가다가 반대방향으로 가기도 하고, 마지막에는 원위치로 돌아간다. 열째 마당 '영산다드레기'는 격렬한 전투장면을 모사하고 있다. 악기와 소고가 두 패로 나눠 밀고 당기며 전쟁을 나타내는 격렬한 굿판이다. 열한째 마당 '진굿'은 군사 굿의 특징을 가장 잘 보여준다. 상쇠와 중쇠가 두 패로 나눠 진을 치고 노는데 이는 격전을 벌여 적을 포위 섬멸하는 것을 나타낸다. 상쇠가 진을 풀면 모든 풍물꾼들이 전쟁이 승리로 끝난 것을 기뻐하며 어우러져 흥을 돋운다. 빗내농악은 군사훈련으로 경쾌하고 빠른 속도로 진행된다. 진(陣)굿 형식으로 일반적으로 농사를 중심으로 하는 대부분의 농악과는 차별을 보이고 있다. 지금은 왕국의 흔적조차 사라졌지만 감문국 백성들과 함께한 농악은 개령들을 중심으로 할아버지와 아버지, 아들, 손자에 이어져 1천700년이 흐른 오늘까지 이어져 오고 있는 것이다.
◆김천에도 왕릉이 있다.
감문국이 소왕국으로 불리는 이유는 감문국에 왕릉이 있기 때문이다. 어느 왕의 무덤인지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하지만 사람들은 감문국에서 유일하게 왕으로 불리는 금효왕의 무덤이라 믿고 있다.
금효왕릉은 궁궐터로 알려진 동부연당에서 감문산 너머 북쪽으로 8㎞ 떨어진 감문면 삼성리 오성마을 야산 입구에 있다. 봉분 높이가 6m, 지름 15m 크기로 이 지역의 무덤 중에는 가장 큰 규모다. 하지만 봉분 위에는 나무가 자라고 있고 주변에 왕릉이라는 표식도 없어 모르고 그냥 지나치기 쉽다.
이 무덤과 관련한 여러 가지 이야기도 전한다. 감문국 시조왕의 무덤이라는 설과 김천의 별호인 금릉(金陵)이 이 무덤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설 등이다.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된 근거는 없다. 또 일부에서는 군왕의 무덤치고는 규모가 작다고 지적한다. 하지만 감문국이 존재했던 비슷한 시기에는 중국묘제인 토광묘가 한반도에도 전래됐지만 군왕이 절대 권력을 확립되지 못한 탓에 봉분을 크게 높이지 않았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고고학'역사학적인 관점과는 별개로 금효왕릉의 규모는 현재보다 큰 규모였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주변을 보면 오랜 세월 동안 밭으로 경작하고 있어 야금야금 파고들어가 전체적인 규모가 많이 줄어들었다. 주민들에 따르면 일제강점기에 수차례 도굴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무덤 안에 부장품의 존재 여부조차 장담할 수 없는 실정이다.
김천문화원 송기동 사무국장은 "마을 주민들에겐 특별한 의미 없는 말무덤으로 불렸다"며 "이 지역에선 '말'은 곧 '크다'는 의미를 가진 접두사이며 따라서 말무덤은 '큰 무덤' 곧 수장(首將)의 무덤으로 보아야 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동국여지승람과 교남지 등에는 이 무덤에 대해 '현의 북쪽 20리에 큰 무덤이 있는데 감문국 금효왕릉이라 전한다'(在縣北二十里有大塚俗傳甘文金孝王陵)고 적고 있다.
조선환여승람에는 "곡송면 삼성동에 큰 무덤이 있어 세상에 전하기를 감문국 금효왕릉이라 한다"고 했다. 감문국개령지는 "이 능(陵)은 감문국 금효왕릉이니 감문면 삼성동에 있으나 잡초와 나무가 분생(奔生)하야 보는 사람의 안타까운 가슴을 진정할 수 없을 만치 거치러웠도다"라고 적고 안타까운 마음을 시(詩)로 남겼다. '옛무덤 거치러지고/ 거치러진 풀이 요란하니/ 아마도 금효왕 넋이/ 편치 않은가 하노라//'
◆장릉(獐陵), 지석묘 고분군도 남아
감문국 궁궐터가 있는 곳이 현재의 동부리 일대라면 서부마을 웅현(熊峴) 도로변 옛 사자사(獅子寺) 절터 옆에는 장릉 또는 장부인릉이 있다. 지금은 포도밭으로 개간이 되어 봉분의 형체마저 허물어지고 없다. 이 무덤은 감문국 왕비의 무덤으로 알려졌다. 일설에는 금효왕 어머니의 무덤이라는 이야기도 전하는데 이 역시 확인할 길은 없다.
동국여지승람에는 '현의 서쪽 웅현리에 장릉이 있는데 세상에서 말하길 감문국시대 장부인의 능이라고 한다'고 적고 있으나, 감문국개령지에는 '일명 장부인릉이라고 하고 달리 장희릉(獐姬陵)이라고 한다. 장희는 감문국 때의 어느 왕이 총애하던 후궁(寵姬)'이라고 기록돼 있다.
이 밖에 감문국 영토였던 개령면과 감문면 일대에는 청동기와 철기시대의 무덤인 지석묘와 고분군이 산재해 있다. 특히 감문면 문무리 마을 주변과 야산에는 수십 기에 달하는 지석묘와 훼손된 석실분이 집단적으로 분포돼 있다. 이는 감문국이 성립되기 이전부터 개령'감문지방이 김천문화의 중심이었음을 대변한다.
◆주조마국 등 김천의 다른 소국들
김천지방에는 감문국 외에도 주조마국(朱漕馬國)을 비롯해 문무국(文武國), 어모국(禦侮國), 배산국(盃山國), 아포국(牙浦國)등이 있었다고 전한다. 감문국 다음으로 널리 알려진 주조마국은 지금의 조마면 일대를 중심으로 감천의 서쪽인 증산'지례'농소면 등까지 자리했던 것으로 보인다. 일찍이 성주(星州)의 성산가야와 밀접한 교류를 맺고 있었으며 김천의 소국 중에는 가장 오래 존재했다. 일본서기에는 흥미로운 기록이 전하는데 신라가 감문국과 사벌국을 복속하고 가야제국을 위협하자 541년과 544년에 대가야, 아라가야, 다라국(多羅國), 졸마국(卒馬國'일명 주조마국) 등이 백제의 힘을 빌리고자 두 차례에 걸쳐 백제왕이 주재하는 회의에 참석했다고 적고 있다. 주조마국이 562년 신라 이사부(異斯夫)가 대가야를 토벌할 때 함께 멸망한 것은 감문국과 주조마국이 '반신라, 친가야 노선'을 편 정책결과로 눈여겨볼 대목이다.
문무국은 "여산(余山)이 망해서 아산(牙山)이 되고 아산이 망해서 김산(金山)이 되었다"는 이곳 어르신들의 얘기로 미뤄볼 때 지금의 감문면 문무리로 보인다. 윗마을을 상여(上余), 아랫마을을 하여(下余)라 하며 문무리 일대에는 청동기시대로부터 철기시대에 이르기까지의 지석묘와 석실묘가 집중적으로 산재되어 있어 문무국의 존재가 새삼 주목되고 있다.
어모국은 어모면 중왕리 아천(牙川) 일대에 자리 잡은 소국이었다. 신라 때 어모국의 이름을 따서 어모현을 설치하면서 지금까지 이름이 전해진다. 배산국은 조마면 장암리 일대에 있었다는 소국으로 실제 마을에 배산(盃山)이라는 산이 있으나 구전으로만 전하는 관계로 증명된 바는 없다. 아포읍 제석봉 아래에는 아포국이 있었다. 주변에서 고분과 흔적이 발견되고 왕비봉, 관리봉, 삼태봉 등 지명이 남아 있어 예사롭지 않다.
여기에 또 다른 흥미로운 얘기가 전한다. 1970년 고령에서 발견된 산천유집(山泉遺集)에는 우륵의 12곡 가야금부가 실려 있다. 넷째 곡에는 "달기의 넷째 곡조여/ 새로 만든 거문고를 보아하니/ 조양의 신성스런 오동나무로 조각하고/ 부상(扶桑)의 신성스런 고치실로 줄을 매었으니/ 용과 봉황이 춤을 추어/ 비취 같은 푸른 무늬를 펼쳤네/ 진쟁(秦箏)을 본떠 만들고/ 상금(湘琴)을 본떠 줄을 매었네//"라고 노래했다. 노래에 등장하는 부상은 지금도 남면 부상리로 불린다. 부상은 일제강점기까지 양잠업이 성행했다고 한다. 이처럼 감문국이 있었던 삼한시대에는 인근 소국끼리 교류가 빈번했으나 고구려'백제'신라 삼국시대로 접어들면서 소국들의 존재감이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더구나 도굴과 개발 등에 밀려나 유적이나 기록들이 전해지지 않아 안타까운 마음만 더할 뿐이다.
박용우기자 ywpark@msnet.co.kr 사진'서화복 작가 texcaf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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