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활의 고향의 맛] 미완의 섬

입력 2012-10-18 14:16:48

풍광 멋진 낯선 섬, 배 시간 쫓겨 잠만 자고 나와

민어를 만나러 전라도 신안군의 지도로 간다. 지난해 민어 찾아왔다가 지도 옆 임자도에서 하룻밤을 잔 적이 있다. 그때 매년 한 번씩 '민어 여행'을 하자고 도반들끼리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다. 토요산방 일곱 도반들이 행장을 갖춰 이른 아침에 출발했다. 대구에서 5시간이 조금 더 걸려 이곳 어판장에 도착한 시각은 정오가 조금 지나서였다.

우리의 목적은 오로지 산 민어 한 마리를 사는 것이다. 태풍 볼라덴과 덴빈이 거푸 두 차례나 지나가는 바람에 조황이 시원찮아 전년보다 숫자도 줄었고 값은 올라 있었다. 4㎏짜리 수컷 한 마리를 12만원에 사고 대신에 2박 3일간의 식사는 우리 손으로 직접 끓여 먹기로 뜻을 모았다. 식당에서 밥을 사먹지 않으면 횟감 생선 비용을 조금 과다하게 지출해도 그리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란 계산이 섰기 때문이다.

여행을 자주 다니는 사람들은 한 번 다녀간 곳을 "또 가자"고 하면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진짜 마니아들은 갔던 장소를 여러 번 가도 마다하지 않는다. 절집 한 곳을 제대로 보려면 봄 여름 가을 겨울은 물론 비 올 때와 눈 올 때도 봐야 한다. 그리고 계곡에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이른 새벽과 저녁노을이 노란 바탕에 붉은 붓질을 하는 은혜로운 순간도 망막 속에 저장해 두어야 한다. 또 푸른 달이 대웅전 처마 끝에 걸리는 그런 밤에도 홀로 거닐며 내가 누구인지 자아(自我)를 찾아 길 떠나는 나그네가 되어 보아야 '제대로 절 구경했노라'고 말할 수 있다.

나는 여행전문가가 아니어서 그런지 몰라도 지도 인근의 증도, 임자도, 도리포 중 한 곳을 잠잘 곳으로 정하고 싶진 않았다. 이곳은 이미 하룻밤씩 신세를 져본 장소이기 때문이다. 도반들의 생각도 마찬가진 듯했다. 우린 요기나 하고 이곳을 떠나자며 증도의 짱뚱어 다리 초입에 있는 솔무등 정자에서 늦은 점심을 먹었다.

어판장에서 산 민어 뱃살과 부레 회를 안주로 술 한두 잔씩을 나눠 마셨더니 '오 솔레 미오'라도 한 곡 뽑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우리가 이 섬으로 들어올 때 썰물로 빠져나간 바닷물이 그새 태도를 바꿔 밀물로 밀고 들어오는 모습을 보니 자연의 이치나 사람이 살아가는 도리가 비슷하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푸른 색깔에 우유를 탄 듯한 밀물의 바다가 술을 마셔 짜릿해진 배 속으로 밀려와 넘실넘실 춤을 추고 있는 것 같았다. 기분이 참 좋다.

이렇게 어정거릴 시간이 없었다. 바닷가를 따라 목포 쪽으로 내려가 보기로 했다. 경치 좋은 바닷가에 펜션이라도 만나면 거기서 하룻밤을 보낼 생각이었다. 항상 그렇듯 계획이 성사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마침 목포 북항에 닿았다. 섬으로 떠나는 마지막 배가 1시간 거리인 안좌도행이었다. 우린 그 섬에 대한 아무런 지식도 없이 무조건 올라탔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처럼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우린 무엇을 보려고 배를 탄 게 아니다. 그냥 하룻밤 자는 것만으로 낯선 섬에 대한 허기를 채우기 위함이다.

'세상한테 이기지 못하고/ 너는 섬으로 가고 싶겠지/ 한 며칠, 하면서/ 짐을 꾸려 떠나고 싶겠지/ 혼자서 훌쩍, 하면서/ 섬에 한 번 가봐라, 그곳에/ 파도소리가 섬을 지우려고 밤새 파랗게 달려드는/ 민박집 형광등 불빛 아래/ 혼자 한번/ 섬이 되어 앉아 있어봐라' 하략)는 안도현 시인의 '섬'이란 시가 가슴을 칠 무렵 안좌선착장에 도착했다.

이곳은 안좌도를 시작으로 팔금도, 암태도, 자은도 등 4개의 섬이 다리로 연결되어 있다. 하늘에서 본 형상은 목포 앞바다를 지키기 위해 꽁꽁 끼워 둔 4개의 단추처럼 보인다. 그래서 이곳을 '신안의 비단 허리띠'로 불린다. 우리는 이들 섬 중에서 풍광이 가장 아름다운 맨 마지막 섬인 자은도에서 민박집을 구했다. 은실민박(010-8603-8090). 성수기가 끝나 방 3개에 8만원이었다.

이곳 4개의 섬은 섬 자체가 박물관이자 놀이터다. 안좌도에서 박지도까지 547m와 박지도에서 반월도까지 915m가 갯벌 위의 나무다리로 연결되어 있다. 요즘은 둘레길을 걷는 사람들과 자전거 동호인들이 몰려와 섬이 품고 있는 풍광과 그 몽환적 분위기를 온몸으로 즐기고 있다. 우린 다음 행선지로 떠날 배 시간에 쫓겨 서둘러 나오느라 두 눈이 호사를 누릴 겨를이 없었다. 이곳 섬들은 내 기억의 갈피 속에 '미완의 섬'으로 남아 있다.

구활(수필가 9hwal@hanmail.net)

최신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