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천 산성리 6·25때 미군 오폭…사망 51명에 보상금 지급키로

입력 2012-10-09 10:11:05

예천산성동미군폭격사건희생자 유족회(대표 안태기)는 지난 2009년 11월 26일 예천군 보문면 산성리 사과집하장 앞에서 산성동미군폭격사건희생자 합동위령제를 개최했다. 구미시 제공
예천산성동미군폭격사건희생자 유족회(대표 안태기)는 지난 2009년 11월 26일 예천군 보문면 산성리 사과집하장 앞에서 산성동미군폭격사건희생자 합동위령제를 개최했다. 구미시 제공

1951년 1월 19일 경북 예천군 보문면 산성리. 6'25전쟁이 한창이었지만 마을은 평화롭기만 했다. 아침 식사를 마친 주민들은 찬바람을 피해 집 안에서 소일거리를 하고 있었고 아이들은 동네 주변을 뛰어 놀고 있었다. 오전 11시. 고요한 겨울 하늘을 찢으며 미군 폭격기가 모습을 드러냈다. 신기한 듯 하늘을 쳐다보던 주민들에게 떨어진 건 폭탄 세례. 순식간에 마을은 불바다가 됐고, 부서진 집과 사체들로 아수라장이 됐다. 이날 폭격으로 목숨을 잃은 마을 주민은 남자 18명, 여자 33명 등 51명이나 됐다. 특히 사망자 가운데 열 살도 되지 않은 어린이가 16명이나 됐을 정도로 결과는 참혹했다. 당시 다섯살이었던 안태기 씨는 이제 66세 노인이 되어 산성동 미군폭격사건희생자 유족회 대표를 맡고 있다. 안 대표도 이날 참상으로 할아버지와 동생, 숙모, 삼촌, 종조모 등 친'인척 10명을 잃었다.

이날 폭격은 명백한 미군의 오폭이었다. 미군은 당시 산성리와 같은 학가산 자락인 안동시 북후면 신전리 '서밭'에 인민군 패잔병 수백여 명이 들어왔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폭격에 나섰다. 하지만 미군은 마을 위치를 오인했고, 엉뚱한 마을에 폭탄을 퍼부었다. 하지만 주민들은 56년이 지나도록 억울한 죽음의 이유를 풀지 못했다. 안 대표는 "1980년대까지도 'USA' 로 표기된 불발탄이 여러 번 발견됐지만 주민들은 이유를 알지 못했다"며 "다행히 AP통신 한국특파원이었던 최상훈 기자가 미군에서 빼낸 기밀문서라며 한 통의 편지를 보내왔고, 기밀문서가 세상에 알려지면서 미군의 오폭임이 증명됐다"고 말했다.

기밀사실을 토대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지난 2005년 6월 이 사건에 대해 진실 규명에 들어갔다. 그 결과, 미 제5공군 소속 6147 전술통제비행편대 정찰기와 전폭기의 세 차례에 걸친 폭격으로 마을 주민 51명이 사망했다는 결론을 냈다. 또 2007년 11월 미국이 배상 및 합동조사를 하도록 미국정부와 적극 협상할 것을 정부에 권고했다. 하지만 진실이 밝혀진 지 5년이 지나도록 희생자와 유족에 대한 명예회복과 적절한 보상은 감감 무소식이었다. 안 대표는 "그동안 지역 국회의원과 예천군을 찾아 여러 차례 억울함을 호소했지만 서로 책임을 미루기만 해 답답한 마음을 풀 길이 없었다"고 털어놨다.

뒤늦게나마 보상길이 열린 점은 다행이다.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소속 새누리당 이한성 의원(문경'예천)은 최근 '예천 산성동 사건 희생자 명예회복 및 보상에 관한 특별 법안'을 대표 발의했다. 보상특별법안에는 국무총리실 소속 '예천 산성동사건 희생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를 두고 희생자와 그 유족에게 피해 정도 등을 고려해 보상금과 의료지원금, 생활지원금을 지급하도록 했다.

예천'권오석기자 stone5@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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