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쌈'… 차려진 밥상 재구성의 味學

입력 2012-09-22 07:01:29

전성시대 맞은 쌈 음식의 사회학

경상남도 남해의 향토 음식인 멸치쌈밥.
'쌈' 채소 위에 내용물인 '소'를 다양하게 얹은 다음 싸서 먹는 우리의 전통적인 음식 섭취 방식인 쌈. 우태욱기자 woo@msnet.co.kr
10여 가지가 넘는 다양한
경상남도 남해의 향토 음식인 멸치쌈밥.
10여 가지가 넘는 다양한 '소'를 싸 먹는 것이 특징인 월남쌈.

싸서 먹는 음식인 '쌈'. 쌈은 다시 겉을 싸는 '쌈'과 내용물인 '소'로 나뉜다. 다양한 재료로 준비할 수 있는 쌈과 소는 각양각색 그리고 각 미(味)로 궁합을 이루며 음식의 풍미를 무한대로 확장한다.

어떻게 보면 쌈은 책임감 있는 리더(leader)다. 수많은 소를 자기 품에 안고(싸고) 간다. 듬직한 쌈은 결코 소를 이탈시키지(흘리지) 않는다. 그러면서 소들은 쌈을 믿고 따른다. 자기 개성(맛)을 뽐내면서 한편으로는 어우러짐의 맛도 낸다. 쌈에 요즘 시대가 원하는 리더와 팔로워(follower)의 모습이 담겨져 있다고 하면 조금 엉뚱한 생각일까? 서로 뭉쳐 다양한 맛의 풍미를 내는 쌈의 매력을 살펴봤다.

◆쌈 음식 전성시대

최근 한 온라인 커뮤니티에 '국가대표 야식 인기 순위 10'이라는 제목의 게시물이 올라왔다. 이를 통해 최근 주전부리 트렌드를 엿볼 수 있었다. 1위가 보쌈이었다. 그런데 야식 대표 주자로 불리는 치킨은 7위, 피자는 10위에 불과했다. 게시물을 본 직장인 장현진(29'대구 중구 대봉동) 씨는 "현관문에 붙는 배달 음식 카타로그에도 이전에는 치킨이 대부분이었던 것이 최근에는 '보족(보쌈+족발) 세트' 등 싸서 먹는 메뉴가 늘었고, 재료 구성도 화려해졌다"고 말했다.

실제로 전통 보쌈의 구성은 삶은 돼지고기와 김치에 상추'마늘'고추 등 몇 가지 채소와 쌈장'새우젓 등의 소스가 전부였다. 하지만 요즘은 족발과 각종 해산물이 추가됐고, 쌈 채소도 외래산이 추가되는 등 가지 수가 늘었고, 그 외 다양한 '소'와 소스가 구절판을 방불케하는 접시에 가득 담겨져 나온다.

전통 음식인 보쌈이 화려한 변신을 하며 야식 업계에서 선전하고 있는 것 외에도 다양한 쌈 음식이 인기를 끌고 있다. 퓨전쌈이 대표적이다. 최근 젊은이들이 다양한 식재료를 골라 맛볼 수 있는 외식 프랜차이즈가 인기를 끌면서 쌈 음식도 이색적으로 변화하고 있는 것. 바나나'사과'키위 등 다양한 과일을 이용하는 과일쌈과 채소가 아닌 얇은 떡을 쌈으로 이용하는 떡쌈 등이 인기다.

외국에서 온 쌈 음식도 이제는 쉽게 접할 수 있게 됐다. 대표적인 것이 쌀로 만든 얇은 피를 쌈으로 사용하는 월남쌈이다. 2000년대 초반부터 인기를 끈 월남쌈은 사실 베트남 전통 음식이 아니다. 월남전 당시 베트남에 머물렀던 한국인들이 호주에 정착하면서 한국의 쌈 문화와 베트남 음식 재료를 결합해 만든 것이라고 한다.

이외에도 멕시코의 타코(밀가루나 옥수수가루를 반죽해 구워 만든 피에 닭고기 등 각종 소를 넣은 것)나 중국의 춘권(밀가루나 쌀가루로 만든 피를 전병처럼 둥글게 말아 그 안에 각종 소를 넣고 튀긴 음식) 등을 주변에서 쉽게 접할 수 있다. 와인 안주로 곁들이거나 디저트로 먹는 카나페(얇고 잘게 썬 빵이나 크래커 위에 야채'고기'생선'달걀 등을 얹은 서양 요리)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우리에게 이미 많이 익숙해진 만두'햄버거'샌드위치도 외국에서 온 쌈 음식이라 할 수 있다. 이쯤되면 외국 쌈과 우리 쌈을 구분해 인식할 필요가 생긴다.

우리 쌈의 특징은 무엇일까? 한마디로 '못 싸 먹는게 없다'이다. 들과 산과 밭에서 나는 다양한 채소를 쌈으로 사용하고, 각종 육류'해산물'야채 등 소의 영역도 제한이 없다. 요리법이 정해진 외국 쌈과 다르다. 그러면서 지역별로 특색있는 쌈 음식이 다양하게 만들어졌다. 이는 우리 쌈의 역사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우리 쌈의 역사

우리 쌈의 유래는 삼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중심에는 '상추'가 있다. 상추는 '날로 먹을 수 있는 야채'라는 뜻인 '생채'에서 유래한 단어다. 생채에서 상치로, 다시 상추로 이름이 굳어진 것이다. 상추는 중국에서 우리나라로 전래됐다. 조선 정조 때 한치문이 쓴 '해동역사'에는 "고구려 사신이 수나라에 들어가 상추를 구입해 들여왔다"고 적혀 있다.

이후 우리나라에서도 상추가 재배됐는데 그 품질을 국제적으로 인정 받았다. 원나라 시인 양윤부는 '원궁사'라는 문헌에 "고려의 상추는 마고(표고)의 향기보다 그윽하구나"라는 시 구절을 남겼다. 이 시의 주석에는 "고려 사람들은 채소에 밥을 싸서 먹는다. 고려의 맛 좋은 상추는 물론 산에 나는 새박나물과 줄나물을 원나라에서 수입한다"라고 적혀 있다.

상추가 귀할 때는 '천금채'라는 별칭이 붙기도 했다. '천금을 줘야 구할 수 있는 값진 채소'라는 뜻이다. 요즘 상추값이 비쌀 때마다 신문 기사에 '금상추'라는 별칭을 붙이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상추가 그럴듯한 쌈 음식으로 궁중 수라상에 오른 것은 조선 정조 때에 이르러서다. 이후 조선 말기에는 궁중에 쌈 상차림 문화가 정착됐다. 그러면서 민중에도 상추 쌈이 널리 보급되기 시작했다. 봄'여름 상추 재배 방법이 소개되면서 민중들은 계절에 크게 구애받지 않고 상추 쌈을 즐길 수 있게 됐다. 다른 채소도 쌈 음식에 사용되기 시작했다. 18세기 조선 실학자 이익이 쓴 '성호사설'에는 "소채(밭에서 가꿔 먹는 채소) 중에 잎이 큰 것은 모두 쌈을 싸서 먹었다"고 적혀 있다. 기록에 따르면 당시 상추쌈뿐 아니라 곰취쌈'깻잎쌈'호박잎쌈'피마자잎쌈 등 지금도 웰빙 쌈 음식으로 찾는 다양한 쌈이 민중 사이에 퍼졌다.

이후 밥상 위에서 평범하고 소박한 역사를 보내던 쌈 음식은 1990년대 이후 기름진 식단으로 인해 성인병 등 각종 질병의 발병률이 높아지자 주목받기 시작했다. 채식을 통한 섬유소 섭취 등의 중요성이 부각되면서 완전 채식은 물론 고기에도 채소를 곁들이는 웰빙 식사 문화가 확산됐고, 샐러드와 함께 쌈이 중심에 선 것이다.

◆쌈 채소 재배하는 도시농부 인기

쌈 음식이 한때의 웰빙 트렌드를 넘어 건강한 식생활의 필수 조건으로 여겨지면서 쌈 재료의 핵심인 각종 채소를 직접 키우는 '도시농부'들도 늘고 있다. 마당이나 아파트 베란다에 텃밭을 마련하거나 시골에 밭을 마련해 채소를 재배하는 것.

특히 한파나 수해 등의 이유로 채소 가격이 급등하는 일이 비일비재해졌다. 그래서 안심하고 먹을 수 있는 것은 물론 저렴한 비용의 이점도 누리기 위해 주말을 이용, 채소 재배에 열심인 사람들이 많다. 자영업자 김우석(60'경북 안동시) 씨는 "3년 전부터 일주일 중 하루나 이틀은 가게 문을 닫고 교외 채소밭에 가서 고추'배추'상추 등을 가꾼다. 처음에는 수확해서 지인들과 나눠먹는 재미에 취미로 시작했지만 이제는 부업이 됐다. 벌이가 제법 쏠쏠하기 때문이다. 내년에는 밭을 더 빌려 재배 규모를 늘릴 계획"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관련 용품의 판매도 늘고 있다. 인터넷 쇼핑몰 옥션에 따르면 올해 3월부터 5월까지 약 3개월간 화분'분갈이 흙'분무기 등 원예기구의 판매량이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191% 늘었다. 또 인터넷 쇼핑몰에는 각종 원예기구를 묶은 '베란다 텃밭세트', 여러 채소를 한꺼번에 재배할 수 있는 '수경재배기' 등 초보 도시농부를 위한 용품도 등장, 인기를 얻고 있다.

◆쌈의 매력은?

전문가들이 보는 쌈의 매력은 무엇일까? 쌈은 어떤 재료를 선택해 구성하느냐에 따라 영양학적으로 완전 음식을 구현할 수도 있는 일종의 '방식'으로 볼 수 있다. 신아가 참자연음식연구소 원장은 "쌈을 통해 자연음식 그대로의 풍부한 영양소를 균형있게 섭취할 수 있다. 맛의 풍미가 다채로워지는 것은 보물같은 덤이다. 그러면서 쌈의 특성상 야채와 채소를 몸에 자연스럽게 공급할 수 있다. 육류 위주의 식생활에 야채와 채소 위주인 쌈은 필수적"이라고 말했다. 또 쌈 음식은 정서적으로도 현대 가족에게 유용하단다. 신 원장은 "쌈은 혼자 먹는 음식이 아니다. 재료를 펼쳐 놓고 여럿이 함께 먹을 수밖에 없는 음식이다. 자연스럽게 온 가족이 모이는 밥상이 마련된다"고 말했다.

쌈은 그 자체로 맛은 물론 사색도 풍부하게 해주는 도구다. 수필가 구활 씨는 "쌈은 예술이다"고 말했다. 그는 "그냥 차려진 밥과 반찬은 입맛 당기는 대로 입에 넣어 씹으면 되지만 쌈은 그렇지 않다. 재료를 손바닥에 쌓아 올려야 하고, 된장이나 갖은 양념 또는 젓갈 국물로 덧칠을 해야 제 맛이 난다. 그래서 미술인 셈이다. 쌈 재료가 푸짐한 식탁을 대하면 붓을 들고 캔버스 앞에 앉은 것처럼 엷은 흥분이 일곤 한다"고 말했다.

황희진기자 hhj@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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