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학년 때 심은 감나무가 고갯길 가로수로…고향길 마중 나오네
가수 홍세민은 '흙에 살리라' 한 곡으로 삼십 년을 넘게 우려먹었다. '초가삼간 집을 지은 내 고향 정든 땅'으로 시작되는 이 노래는 고향 교향곡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노래방 노래책을 펴보면 '고향'으로 시작되는 제목이 수없이 많다. 그 가운데 이 곡이 장수할 수 있었던 것은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제목에 고향이라는 단어를 넣지 않고 흙에 살리라는 은유적 표현을 씀으로써 아련히 고향에 대한 향수를 더욱 자극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왜 남들은 고향을 버릴까'라는 가사처럼 1970년대 초반은 본격적인 이농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한 때였다. 부모는 논밭 길을 갈며 고향에 남고, 자식들은 자식들대로 아기 염소 소리를 뒤로하고 도시로 떠났다. 그러니 이 노래는 곧 역사의 변곡점을 의미하는 노래이기도 하다.
내 고향은 경북 청도군 화양면 남성현이다. 남성현은 지금의 와인터널이 있는 송금동에서 남쪽으로 다로동, 삼신1동, 용암온천이 있는 삼신2동까지다. 온천 뒤쪽 오붓실에는 복숭아밭이 무릉도원으로 펼쳐져 있고 군자정과 유등연지, 청담 갤러리가 길손을 반겨 준다. 남한에서 두 번째로 긴 굴이 남성현 굴인데 그 옆에 비어있는 굴을 낭만적으로 개조한 것이 와인터널이다. 용암온천은 그 시절에도 논물이 따뜻하다는 말이 있어서 개발에 성공한 것 같다.
나는 남성현에서 태어나서 12년을 그곳에서 살았고 그 햇수보다 세 배나 많은 시간을 도시에서 살았다. 그러나 촌 출신들이 그렇듯이 나 역시 아직까지 말씨며 입맛이며 온통 시골 정서에 젖어 있다. 이런 것을 사회학 용어로 아비투스(habitus)라 하고 시골풍으로 해석하면 '짱배기에 부은 물, 발등에 떨어진다'가 되겠다. 세상에 태어나 처음 보고 듣고 겪은 삶이 골수에 사무치지 않고 어디로 가겠는가.
네댓 살 때까지 호롱불을 켜고 살았던 일, 어디에서 온 포수들이 노루를 잡아 묶어 들고 가던 모습, 벼랑에 '우리 마을 화투 없는 마을'이라고 삐뚤빼뚤 크게 써 놓은 글씨, 해거름에 숨바꼭질 놀이로 농협 창고 뒤에 숨었다가 그 뒤편 아래로 떨어져 다음날 깨어난 일, 작은아버지가 키우시던 젖소와 산양들을 몰고 세방골에 가서 타울거리며 뽕나무 가지를 드리워 뽕잎을 먹이던 일, 동네 방앗간에 수많은 실타래처럼 말리던 국수 사이를 꾀꾀로 분질러 먹던 일, 구데기 새끼가 꼬물꼬물 슨 간고등어를 나보고 우물에 가서 씻어오라던 큰외숙모, 가마솥 아궁이에 불을 때고 밥하던 일, 암탉이 금방 낳은 따뜻한 계란을 짚둥우리에서 꺼내던 일, 겨울 냇가에서 맨손으로 빨래하던 일, 동생을 업고 학교에 가서 교실 뒤에 눕혀 놓고 공부하던 일, 늦가을이면 급우들과 산에 가서 교실 난로에 땔 나무를 하던 일, 어둑신한 저녁에 커다란 짐승이 산에서 내려와 들판의 낟가리 속으로 쑤욱 들어가는 모습을 보고 공포에 떨었던 일, 어둠 속 개여울에 소살소살 물 흘러가는 소리, 새벽닭이 자처울고 군용열차의 기적소리가 아득히 밀려오면 내 누워있는 여기가 어디인지, 어린 나이에도 그 하잔하던 날들이 아직 기억에 선하다.
나의 할머니는 남성현역 앞에서 장사를 하셨다. 돼지고기와 막걸리와 국수를 파셨다. 각다분한 세상에 문맹으로도 홀로 장사를 하신 할머니는 우리에게 하늘 같은 사랑을 주셨다. 방학 때 할머니께 가면 모닥모닥 밑반찬을 챙겨 당신의 거무죽죽한 손으로 동생과 나를 보듬으며 100원짜리 종이돈 두어 장과 동전을 따로 꼭 쥐여 주신다. 큰 돈은 책 사고 작은 돈은 기차 타고 가면서 과자 사먹으라고….
우리 집에는 농사가 없었다. 할머니의 오빠가 도와주셔서 아버지는 텔레비전과 전축과 새끼 꼬는 기계를 사고, 집을 수리하고 탁구장을 차리셨다. 동네 사람들이 드라마 '여로'를 보기 위해 밤마다 우리 집에 잔뜩 모여들었다. 아랫마을 외가에는 큰 농사를 지어서 나는 가끔 모내기 못줄을 잡거나 콩타작 도리깨질에 합류할 수 있었다. 점심때면 라디오에서 성우 구민 씨가 들려주는 분단 비극에 관한 스토리 '5분 드라마 방랑시인 김삿갓'이 늘 흘러나왔다. 외할머니가 새댁 때 신행에서 돌아오니 시댁 식구들이 낮잠을 자고 있어서 조용히 베틀에 앉아 베를 짜기 시작하셨다는, 그 길로 외할아버지와 한평생을 이루신 터전이 아직 촌에 남아있다. 나는 그 외갓집에서 우물에 두 번이나 빠지고, 눈꼽재기창으로 암소가 송아지를 낳는 걸 보고, 변소에 앉아서 정말이지 어른 허벅지만큼이나 굵은 누런 구렁이가 서까래 위를 느릿느릿 건너가던 걸 보았다.
우리 가족은 내가 초등학교 5학년을 마치는 겨울방학 때 대구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선생님께서 학교 숙직실에서 송별회를 열어주셨다. 친구들이 크라운 산도와 말표 사이다를 푸짐하게 차렸다. 과자도 정담으로도 달랠 수 없는 석별의 밤이 깊어지자 선생님께서 내게 노래 한 곡을 부르라고 하셨다. "미워도 한세상~ 좋아도 한세상~~ 마음을 달래며~ 웃으며 살리라~~." 나훈아의 '너와 나의 고향'이다. 친구들은 '홍도야 우지마라'를 답가로 불러주었다. 선생님도 손뼉을 치며 목청껏 같이 불렀다. 알감자 같은 별들이 이순신 장군 동상 위에서 빛나던 겨울밤이었다.
와인터널의 와인 재료는 감인데, 청도와 남성현은 본래 감 생산지로 유명했다. 고향에는 우리 손으로 직접 만든 명소가 있으니, 경산을 지나 청도 방향으로 가는 국도, 남성현 고갯길부터 남성현 초등학교를 지나서까지 줄지어 선 감나무 가로수가 그것이다. 교장 선생님의 지시로 초등학교 5학년 때 6학년 선배들과 오뉴월 내내 땡볕 아래서 감나무를 심었다. 그리고 나무에 각자의 이름표를 달아 학교를 오갈 때마다 살피며 가꾸었다. 거름을 주고 가뭄 때는 개울물을 떠다 주었다. 그 감나무가 자라서 해마다 주저리주저리 감을 매달고 가을이 되면 아름다운 단풍을 이룬다. 그 길을 지날 때마다 나는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간 것 같다.
고향은 삶의 기원이며 원형이니 없을 수가 없고 잊히지도 않는다. 애틋한 추억만큼이나 나는 고향에 대한 반감도 오래도록 컸다. 고향에 대해 말하기가 싫고, 가고 싶지 않은 곳이기도 했다. 고향이 무슨 죄가 있으랴만 내 고향은 동시에 부모의 처소여서 그 스산하고 거친 불화가 검질기도록 그림자를 드리웠다. 아직도 내가 무섬을 많이 타는 이유가 거기에 있지 않나 싶다.
12세기 철학자 생 빅토르 후고는 고향에 대한 인간의 정서를 세 가지로 나누었다. "자신의 고향을 달콤하게 여기는 사람은 주둥이가 노란 미숙아이며, 모든 곳을 고향처럼 느끼는 자는 그보다 상급에 속한다. 모든 곳을 타향으로 여기는 자가 맨 위에 자리한다"고 했다. 삶의 준거를 좁게 삼지 말고 넓고 멀리 보라는 뜻이겠다. 그러나 아무리 코스모폴리탄이나 이방인이 된다 해도 흙의 위대함을 저버리기는 어려울 것이다. 은결든 그림자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시골에서 태어난 것을 가장 큰 행운으로 여긴다.
나의 졸시 '지붕을 잃어버리다'에 썼듯이 명지바람 발밤발밤 지붕 위를 거니는 소리, 자드락비 떨어지는 소리, 감또개 똑또그르르 굴러 내리는 소리, 그 우주의 초침 소리가 나를 키웠고, 외가에서 막내 외삼촌이 보내주는 곡식이 제일 맛있어서 나는 만금을 준다고 해도 이민을 갈 수가 없다. 올봄에는 혼자 시외버스를 타고 고향에 가서 나물을 뜯어왔다. 달래 나물은 내년 봄까지 먹기 위해 매지매지 싸서 아끼고 쑥은 국을 끓여 겨울에 딸아이가 귀국하면 주려고 고이 얼려 두었다.
사윤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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