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주일 훈련 20세미만 700여명 '장렬히 죽으라' 유일한 명령
아무도 그들에게 승리를 기대하지 않았다. 전투에 나서기 전 이들에게 내려진 명령은 단 하나, '장렬히 죽으라'였다. 하지만 700여 명의 학도병은 기적을 만들어냈다. 6일 간의 전투 끝에 북한군을 괴멸시키고 적의 보급로를 차단하는 데 성공했다. 비록 사람들의 기억에서는 잊혀졌지만 장사상륙작전은 한국전쟁의 승리를 견인한 기적의 전투로 평가받는다.
14일 경북 영덕군 장사해수욕장에서 장사상륙작전의 의미를 되새기고 숨져간 용사들을 위로하는 '장사상륙참전 전몰용사 합동위령제'가 열렸다. 올해로 32회째를 맞은 이날 위령제에는 참전용사와 유족 등 100여 명이 참석했다.
장사상륙작전유격동지회 김영재(82) 회장은 "전투 당일 지휘관이 우리 모두를 모아 놓고 '여러분의 죽음으로 대한민국은 승리할 것'이라는 연설을 했습니다. 우린 그 말이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무작정 전투함에 올랐죠"라고 회상했다.
1950년 9월 14일 오전 5시. 772명의 부대원들은 2천700t급 전투함 '문산호'를 타고 영덕군 남정면 장사리 해변에 도착했다. '722유격대'란 거창한 이름이 붙었지만, 1주일 전 입대해 밀양에서 기초 군사훈련만 받은 17~20세의 학도병들이 전부였다. 당시 한미 연합군은 인천상륙작전을 하루 앞두고 적의 이목을 돌리기 위한 양동작전을 계획했다. 승리가 아닌, 하루 이상만 버티는 것이 유일한 목표였다. 이들에게 주어진 보급품도 1㎏ 밀가루 6봉지와 소련제 장총이 전부였다.
전투는 순탄치 않았다. 그날 동해안 일대에는 태풍이 불었고, 문산호는 해안가에서 30여m 떨어진 곳에서 좌초됐다. 파도와 사투를 벌이며 상륙을 시도하는 학도병들의 머리 위로 총탄과 포탄이 쏟아졌다. 10시간의 악전고투 끝에 상륙에는 성공했지만 이날 하루 전사한 대원만 198명에 달했다. 북한군은 불리한 전세를 뒤엎기 위해 장사리에 1사단 이상의 주력부대를 보냈고 이를 틈타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이 실행됐다. 맥아더 장군은 종전 후 '722유격대의 동지들이 보여준 용맹과 희생은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영원히 빛나는 귀감이 되며 찬사를 받을 만하다'는 친필 비문까지 남겼다.
전투가 끝난 후 살아남은 대원은 300여 명이 고작이었다. 꽃다운 나이에 목숨을 잃은 학도병들의 공적은 종전 후 50년 동안 빛을 보지 못했다. 1997년 3월 6일 해병대가 갯벌 속에 좌초된 문산호를 발견하면서 당시 상황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김 씨는 "1980년 80여 명의 전우들을 모아 모임을 만들었지만 상당수가 유명을 달리해 30명 정도가 남았다"며 "우리는 이렇게 살아남아 있으니 이제라도 위안을 받고 있지만, 당시 죽어버린 전우들은 아직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채 잊혀져가고 있다. 유골이나마 수습해 유족들에게 전달해 주는 것이 살아남은 우리들의 의무"라고 말했다.
포항'신동우기자 sdw@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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