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보다는 '살아감'에 의미를 두세요."
생식요리법을 한 달 정도 배웠다. 강사는 생식 때문에 미국까지 다녀온 유학파였다. 그녀의 주방에는 가스레인지나 냄비 같은 것은 당연히 없었다. 여러 조리기구로 꽉 채운 우리 집 부엌에 비하면 썰렁할 정도로 단출했다.
인류가 불을 사용하면서 진화했다는 학설을 뒤집어 보이는 이야기를 했다. 질병이 생식(生食)이 아닌 화식(火食) 때문이라는 주장도 펼쳤다. 의사로서 이해하기 불편한 이야기도 많았지만 생식요리법 자체는 흥미진진했다.
화학적으로는 이렇다. 뭐든 익히면 우선 씹기가 편하다. 덩달아 맛도 좋아지고 생체 내 소화흡수율도 날것을 먹는 것보다 높아진다. 그러니 같은 양의 고구마를 먹더라도 날것을 먹으면 익혀 먹는 것보다 체중이 준다. 잘만 응용하면 비만 치료에는 '딱'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도 모든 먹거리를 생식으로 하는 것은 의사로서 반대할 근거는 많았다.
강사는 생식에 집착했다. 부침개 냄새 때문에 명절에는 부모님 댁에도 가지 않는다고 했다. 이쯤 되면 근거 미약한 건강상식이 따뜻한 인간관계마저 상처를 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건강하게 오래 사는 것만 성공적 삶일까?
2012년 한국인의 평균수명은 80.8세이고 2031년에는 100세로 늘어날 것이라 한다. 그렇다면 지금 대학교 다니는 아들과 고등학생 딸은 확인이야 할 수 없겠지만 100살까지는 살 것이다. 불로장수의 약초를 찾아다녔던 진시황이 지하에서 이 소식을 듣는다면 시대를 잘못 타고난 자신을 한탄했을 법하다. 그러나 우리는 안다. 100세 장수가 축복만은 아님을.
돈 버는 기간보다 안정적인 수입 없이 쓰기만 하는 기간이 훨씬 길어지는 100세 장수는 급증하는 의료비와 생활비 부담으로 노인들의 처진 어깨를 더욱 움츠리게 할 것이다. '유전장수'는 축복이지만 '무전장수'는 형벌이라며 보험회사는 수많은 연금보험 상품을 만들어낸다. 노력하면 건강한 100세의 목표를 얻을 수 있다고 대대적인 홍보도 한다. 암에도 안 걸리고 또 걸리더라도 의지로 꼭 이겨내야 하고, 당뇨나 고혈압 등의 성인병도 없어야 한다. 이것이 우리의 노력으로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쯤 되면 장수는 우연보다 피나는 노력의 대가임에 틀림이 없다. 그렇지만 그것은 언제까지나 평균적으로 그렇다는 것이다. 11세부터 99세까지 다양한 죽음을 보며 빨리 병 들어 죽는 것이 내 삶을 소홀히 관리해서 생기는 단순한 결과가 아님을 알게 됐다. 55세의 잘나가던 사장님이 혈액암에 걸려서 투병 3년 만에 말기 암환자로 변한 것이 인생을 잘못 산 결과는 아니다. 건강에 집착하는 노력의 일부라도 인간다운 살아감에 투자하는 것이 죽음의 법칙을 극복하는 유일한 해결책이다.
김여환 대구의료원 호스피스'완화의료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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