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 '통일' 패션…맹목적 흉내내기의 사회학

입력 2012-09-08 07:30:24

개성 위해 유행 따르기 "우리 사이엔 생존의 문제"

지난 겨울
지난 겨울 '등골브레이커'라고 불리며 사회적 화두가 됐던 모 아웃도어 브랜드의 패딩 점퍼. 한 웹툰에서는 비싼 가격 때문에 짝퉁을 구입하는 청소년들의 실상을 풍자하기도 했다.

"내 친구들은 다 입었단 말이야!"

지난 겨울 '등골브레이커'가 사회적 화두였다. 등골브레이커란 청소년들이 수십만원 하는 모 아웃도어 브랜드 패딩 점퍼를 사기 위해 부모의 등골이 휠 만큼 힘들게 만든다는 뜻에서 비롯된 은어.

이 패딩 점퍼를 입기 위해 청소년들은 부모에게 부단히 떼를 썼다. 그게 안 통하면 일부는 또래가 입은 것을 강제로 빼앗기도 했다. 그러면서 이 패딩 점퍼는 청소년 사이에 유행을 탔다.

문제는 '가지면 좋고 못 가지면 그만'이 아니라, '반드시 가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다른 세대와는 조금 다른 '무분별한 유행 문화'를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청소년 패션 유행 양상

사실 청소년 사이에 유행하는 패션은 늘 과열 양상을 보였다. 최근 인기를 얻고 있는 모 케이블방송 드라마 '응답하라 1997'에는 1990년대 청소년 유행 패션이 등장한다. 중'고등학교 교복 코트마냥 여겨졌던 '떡볶이 코트'(단추가 떡볶이처럼 생겼다고 붙은 이름)나 남성 아이돌 그룹이 입고 나와 인기를 끈 바지통이 큰 '힙합 바지'가 대표적이다. 당시 중학생이었던 손준원(30) 씨는 "학교에선 모 캐주얼 브랜드의 떡볶이 코트를, 하교 후 친구들과 몰려다닐 땐 모 외국 브랜드의 힙합 바지를 반드시 입어야 했다. 그래야 친구들이 무리에 끼워줬다. 옷을 사기 위해 난생 처음 아르바이트도 해봤다"고 말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청소년 패션은 무리에 끼느냐 끼지 못하느냐를 구분 짓는, 조금 변형된 'TPO'(Time'Place'Occasion의 줄임말로 시간'장소'경우에 따른 패션 원칙)다. 이게 요즘 얘기인 것만은 아니다. 거슬러 올라가면 1980년대에 친구들과 함께 롤러장에 놀러가기 위해선 반드시 땡땡이무늬 셔츠에 특정 브랜드 청바지를 입어야 했다.

그러면서 요즘 패션가를 선도하는 주류는 20대에서 10대로 교체됐다는 얘기도 나온다. 한 패션업계 관계자는 "김연아'소녀시대 등 10대이거나 10대를 겨냥한 연예인들이 인기 패션 브랜드의 광고 모델이 되는 등 시장이 커졌다. 인터넷 쇼핑몰도 10대를 겨냥한 숍이 부쩍 늘었다"고 말했다.

그만큼 씀씀이도 커졌다. 성인들도 고가에 혀를 내두르는 아웃도어 브랜드에 청소년들은 골몰한다. 고등학생 박 모(17) 군은 "등골브레이커 논란 이후 해당 아웃도어 브랜드는 친구들 사이에 인기가 한풀 꺾였다. 그래서 유명 아이돌 그룹이 광고 모델로 나오는 다른 아웃도어 브랜드로 갈아탔다"고 말했다. 요즘은 패딩 제품 외에도 슬림한 바람막이 재킷과 밑단이 좁은 등산복 바지가 인기란다.

청소년 사이에 쓰는 '클론'이라는 속어가 있다. 단어 그대로 '복제'라는 뜻으로 과도해진 유행 패션을 조롱하는 말이다. 박 군에 따르면 청소년 사이에 유행하는 패션이 교체되는 계기는 이렇다. "한 유행 패션이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 과하다 싶을 정도로 많아지면 일순간 클론으로 인식됩니다. 그러면 소위 '잘나가는' 애들이 다른 유행 패션을 찾아 입죠. 이후 그걸 따라 입는 애들이 또 늘어나게 됩니다. 이게 반복되죠."

◆아이돌 대세에 팬픽 유행

중학생 김모(14) 양은 최근 컴퓨터와 스마트폰을 이용한 온라인 접속 시간이 늘었다. 게임을 하는 것도, 인터넷 쇼핑을 하는 것도 아니다. 얼핏 보기에 포탈사이트를 통한 단순한 정보 검색이다. 그래서 부모님께 혼날 염려도 없다. 김 양이 최근 빠져든 것은 '아이돌 팬픽'을 찾아 읽는 것이다.

팬픽은 팬(Fan)과 픽션(Fiction)의 합성어다. 자신이 좋아하는 연예인을 주인공으로 쓴 소설을 말한다. 주로 10대 소녀 팬들이 좋아하는 아이돌 그룹을 등장시켜 온라인에 연재한다. 1990년대에 아이돌 그룹이 처음 등장했을 때부터 있었다.

김 양은 "한 반에 10여 명은 팬픽을 구독하고, 직접 써서 돌려 읽기도 한다"며 "좋아하는 연예인을 가상의 이야기 속에 등장시켜 내 마음대로 행동시키는 매력이 있다"고 말했다.

팬픽과 비슷한 것으로 '상황문답'이 있다. 팬픽보다 쓰기 쉬워 인기란다. 아이돌 그룹의 한 멤버가 자신과 어떤 가상 상황에 있다고 설정한 뒤 질문을 적은 다음, 거기에 답도 다는 일종의 자문자답 형식이다. 이를 온라인에 게시하면 다른 또래들이 와서 댓글을 다는 등 즐거움을 공유하는 것이다.

실제로 인터넷을 통해 팬픽 사이트를 검색해봤더니 카페'블로그 등 사이트 수십여 개가 화면을 가득 채웠다. 모 아이돌 그룹의 팬픽 카페는 회원이 10만 명이 넘었다.

그런데 팬픽 게시글 중에는 괄호를 치고 '수위'라고 표시된 것이 있었다. 남성 아이돌 그룹 멤버들 간에 사랑에 빠지는 설정의 동성애 코드나 다소 '야한' 표현이 담긴 작품이란다.

◆우려스러운 유행도

일부 수위를 넘는 팬픽을 넘어서는 인터넷 소설이 청소년들 사이에 유행이다. '체벌 소설'이 대표적이다. 소설 속에 가상의 인물이나 또래 친구를 등장시켜 영화에서나 볼 법한 폭력적인 체벌 장면을 묘사하는 것이다.

지역 청소년상담센터 관계자는 "체벌 소설을 읽어봤더니 영화의 잔인한 폭력 장면을 묘사한 것은 물론 학교 폭력을 생생하게 재현한 것도 있었다"며 "10대들이 스트레스를 풀 수 있는 방법이 많지 않아 점점 자극적인 인터넷 소설을 쓰고 공유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체벌 소설 카페는 최근 학교폭력 문제와 관련해 문제시되면서 대부분 폐쇄됐다. 하지만 인터넷에서 검색해봤더니 19세 미만은 접속할 수 없는 '성인 콘텐츠'로 분류돼 있을 뿐 수십 개의 체벌 소설 게시글이 떴다. 부모님 주민등록번호로 인터넷 접속을 하는 아이들의 사례는 이제 흔한 얘기가 됐다. 체벌 소설이 청소년 사이에 계속 퍼지고 있다는 얘기다.

이러한 우려스러운 유행은 스마트폰을 타고 현실로도 드러난다. 최근 유행하고 있는 '티아라 놀이'다. 티아라 놀이는 최근 같은 이름의 아이돌 그룹 멤버들 간 벌어진 왕따 논란이 가십거리로 퍼지면서 초등학생들이 이들을 그대로 따라한 것이다. 초등학생들은 또래 중 한 명을 왕따로 지목한 다음 스마트폰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 메신저로 명령을 하거나 욕을 하는 등 괴롭힌다. 만약 지목된 친구를 괴롭히기를 거부하면 자신이 그 다음 술래(왕따)가 된다. 이름과 달리 절대 놀이가 아닌 것이다.

이전까지만 해도 초등학생들은 스마트폰으로 단순 연락이나 게임 등을 이용했다. 그러던 것이 이제는 왕따 등 현실의 그늘진 부분을 그대로 스마트폰으로 재현하는 수준에 이르고 있다.

◆맹목적인 흉내내기가 문제

한 패션 전문가의 분석에 따르면 애플사 CEO였던 고 스티브 잡스가 신던 모 브랜드 운동화가 최근 청소년 사이에 유행하게 된 과정은 이렇다. "스티브 잡스가 운동화를 신은 모습이 애플사의 성공 신화와 함께 이미지화돼 미디어에 노출됐다. 외국 패션 리더들이 스티브 잡스의 운동화를 따라 신었다. 우리나라 유명 연예인들이 외국 패션 리더들을 따라 신었다. 그러자 인터넷 쇼핑몰에 해당 운동화가 잔뜩 진열됐다. 이걸 소위 '일진' 청소년들이 사서 신었다. 그걸 다른 또래들이 따라 신었다. 비싸서 사지 못하는 아이들을 위해 저렴한 짝퉁을 파는 곳도 함께 성행했다. 다른 청소년 패션도 별반 다르지 않다."

청소년들은 스티브 잡스가 신었건 말건 신경쓰지 않거나 아예 그러한 사실조차 모른다. 점점 과정을 거듭할수록 '맹목적'인 '흉내내기'가 강화되는 것이다.

그러면서 청소년들은 기성세대와 자신들을 구분짓겠다며 몸치장에 골몰한다. 경북대 사회학과 이동진 교수는 "청소년들은 각종 몸치장을 통해 기성세대와 차별화된 자신들만의 또래 문화를 만든다고 생각한다"며 "과잉 양상을 보이면서 학교폭력 등 청소년 관련 문제도 낳고 있다"고 말했다.

황희진기자 hhj@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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