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역사와 함께 국악 향기, 흉터는 아물지 않았는데…

입력 2012-09-05 07:43:06

포도의 고장 충북 영동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 주저리 열리고/ 먼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이육사의 시 '청포도'의 일부다. 시에 나타난 풍경처럼 한여름 뙤약볕에 포도가 탐스럽게 익어가고 포도 송이마다 굵은 사연이 맺혀 있는 고장이 있다. 바로 전국 최대의 포도 산지이자 노근리 양민 학살 사건의 아픔을 간직한 충북 영동이다. 농익은 포도 향기에 마음이 취하는 계절, 영동으로 역사 기행을 떠났다.

◆노근리 평화공원

기자가 방문한 날, 노근리에 비가 내렸다. 유난히 무덥고 뜨거웠던 1950년 여름, 그 처절했던 기억과 상처를 씻어 내려는 듯 비가 장대같이 쏟아졌다.

노근리 양민 학살은 한국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7월, 미 공군기의 폭격과 미 제1기병 사단 소속 병사들의 무차별 사격으로 노근리 일대 경부선 철로와 쌍굴다리로 알려진 터널에서 무고한 양민 수백여 명이 희생된 사건이다. 50여 년 동안 역사의 뒤안길에 묻혀 있다 1999년 AP통신의 보도로 세상에 알려졌다. 이후 진실 규명에 나선 생존자들과 유족들의 끈질긴 노력으로 2004년 '노근리 사건 희생자 심사 및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지난해 말 쌍굴다리 주변에 평화공원이 조성됐다. 13만2천여㎡(4만여 평) 규모의 평화공원에는 평화기념관'위령탑'조각공원'전망대 등이 자리 잡고 있다.

2개(지하 1층과 지상 1층)의 전시실로 구성되어 있는 평화기념관은 노근리 사건의 전말을 엿볼 수 있는 곳이다. 참담했던 당시 분위기를 상징하듯, 회색빛 가득한 콘크리트 길을 따라 내려가면 지하 전시장이다. 입구에 붙어 있는 '인권회복은 수많은 이들의 땀과 희생으로 이뤄지며 평화는 누리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에게 주어진다'는 문구를 통해 평화기념관이 건립된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지하 전시장에는 노근리 사건 현장이 재현되어 있다. 참상을 형상화한 도예 작품 '길'과 전시되어 있는 기관총이 긴박했던 당시 상황을 간접적으로 말해준다. 생존자들과 미군들의 증언을 들을 수 있는 터치스크린도 설치되어 있다. "옹기종기 앉아 있던 가족이 즉사했어요. 쌍굴에 들어가 보니까 사람이 하얗게 엎어져 있어요. 위에는 쾅쾅 폭탄이 떨어지고 쌍굴 입구 양쪽에서는 기관총을 쏴대지. 그러니까 사람이 얼마나 많이 죽었겠어요." 아들과 딸을 잃고 자신도 복부에 총상을 입은 박선용 할머니가 전해주는 '그 여름날의 기억'은 여전히 아물지 않은 상처로 남아 있다. 또 한쪽 벽면을 가득 메운 희생자들의 이름에서는 지금도 아우성이 들리는 것 같다.

지상 전시장은 노근리 사건 이후를 조명한 곳이다. 생존자와 유족들이 벌인 진실 규명 노력과 2001년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의 유감 표명, 노근리 평화공원 조성으로 이어지는 과정과 아직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피해 보상 등 노근리 사건이 남긴 과제를 살펴볼 수 있다.

전시장 한쪽에는 방문자들이 남긴 글이 빼곡히 붙어 있다. "더 이상 우리 민족에게 이와 같은 아픈 시련이 없기를 기원합니다." "모르고 있던 노근리 사건을 이제야 알게 되었습니다. 희생되신 분들의 명복을 빕니다." 방문자들이 남긴 짧은 글에는 노근리 사건은 우리 모두의 일이며 다시는 되풀이되어서는 안 될 역사라는 공감대가 묻어 있다.

평화공원 맞은편에는 노근리 사건 현장인 쌍굴다리가 있다. 등록문화재 59호로 보존되어 있는 쌍굴다리에는 수많은 총탄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어 이를 보는 사람들은 마치 한국 현대사의 큰 흉터를 마주 대하는 느낌을 받는다.

평화기념관은 무료로 개방(매주 월요일 휴관)되며 오전 9시 30분부터 오후 5시 30분까지 관람할 수 있다. 지하 전시장 입구에 있는 영상실에서는 '인권과 평화의 이름, 노근리'라는 제목의 16분짜리 영상을 관람할 수 있다.

◆국악의 고장

영동을 대표하는 문화 아이콘은 국악이다. 우륵'왕산악과 더불어 한국의 3대 악성으로 불리는 난계 박연이 태어난 곳이기 때문이다. '벼슬보다 음악이 더 좋다'라는 말을 남긴 박연은 조선 세종 때 우리나라 음악의 이론과 제도를 체계화한 인물. 고당리에는 그의 묘소와 위패를 모신 난계사를 비롯해 난계국악박물관'국악기 제작촌'국악기체험 전수관 등이 모여 있어 국악 테마파크를 연상시킨다.

박연의 뜻과 업적을 기리기 위해 2000년 9월 개관한 난계국악박물관에는 가야금을 비롯한 현악기 14종과 타악기 37종, 관악기 19종 등 100여 종의 국악기와 국악 의상이 전시되어 있다. 특히 국악과 관련된 희귀 자료를 관람할 수 있어 교육장으로 손색이 없다. 종묘제례악 등에 사용되었던 편경과 편종, 박연이 우리나라 음악을 최초로 체계화해서 그 악보를 적어 놓은 세종실록, 당악'아악'향악에 대한 해설과 악기 연주 순서 등을 기록한 대악후보, 음의 높이를 정하기 위해 만든 12개의 관인 12율관 등의 희귀 자료는 보는 것만으로도 가치가 있다.

난계국악박물관은 3~10월 오전 9시~오후 6시, 11~2월 오전 9시~오후 5시 문을 연다. 매주 월요일 휴관하며 입장료는 어른 500원, 청소년 300원, 어린이 200원이다.

난계국악박물관 맞은편에 있는 국악기체험 전수관은 2006년 문을 열었으며 체험전수실'영상세미나실'개인연습실 등으로 꾸며져 있다. 100명 이상이 한꺼번에 국악기를 체험할 수 있는 공간과 숙식을 하며 국악 체험을 할 수 있는 콘도미니엄 형태의 숙소를 갖추고 있다.

#TIP

2005년 '포도'와인산업 특구'로 지정된 영동에는 전국 포도 재배 면적의 12.6%를 차지하는 2천225㏊의 포도밭이 있다. 포도의 고장답게 영동군에는 와이너리가 많다. 현재 40여 곳의 와이너리에서 '샤토 미소' '여포의 꿈' '필와인' '샤토비아드' '르보까쥬와인' '갈기산와인' 등 다양한 맛과 향을 지닌 와인을 생산하고 있다. 또 영동블루와인농원 등 와인 체험을 할 수 있는 시설도 마련되어 있다.

올 10월 3일부터 7일까지 와인과 함께하는 영동난계 국악축제가 열린다. 난계사'군민운동장'용두공원 등에서 개최되는 국악축제에서는 서울시국악관현악단'난계국악단 공연과 난타 퍼포먼스 등이 펼쳐지고 미니어처국악기제작체험'난계국악단과 함께하는 국악교실 등의 체험행사도 열린다.

대구에서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서울 방면으로 달리다 황간IC에서 내려 대전'영동 방면으로 접어들면 바로 노근리 평화공원 이정표가 나타난다. 난계국악박물관은 노근리 평화공원에서 20여㎞ 떨어져 있다. 대전'영동 방면~대전'무주 방면~보은'대전 방면으로 달리다 고당교를 건너 바로 우회전하면 난계국악박물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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