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내전에 공화파 병사로 참전했던 조지 오웰은 어느 날 프랑코 반란군 병사 한 명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그 병사는 상의를 걸치지 않고 두 손으로 바지를 움켜쥔 채 비틀거리고 있었다. 당연히 사살했어야 하지만 오웰은 그러지 못했다. "나는 파시스트에게 총을 쏘려고 이곳에 왔다. 그러나 바지를 움켜쥐고 있는 그 사람은 '파시스트'가 아니었다. 그는 분명 우리와 똑같은 생명체였다. 여러분도 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을 것이다."
적을 향한 이 같은 연민은 오웰 같은 휴머니스트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2차 대전 때 태평양 전선에서 싸운 S. L. A 슬램 마샬이 유럽과 태평양 전투에 참전한 병사 수백 명을 인터뷰해 1947년 펴낸 '총기 발사를 거부하는 사람들:전쟁 지휘의 문제'는 이를 잘 보여준다. 이 책의 내용은 참으로 놀랍다. 참전 용사 중 15%만이 적을 향해 총을 발사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인간의 본성이 착하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이러한 추론은 현대 생리학에 의해 사실로 바뀌고 있다. 바로 미주신경의 기능 발견이다. 미주신경은 12개의 뇌신경 중 10번째에 해당하는 것으로, 국내에서도 출판된 '선(善)의 탄생'의 저자인 미국 심리학자 대커 켈트너 교수는 이를 '연민 신경'이라고 부른다. 그에 따르면 이 신경의 활성화 정도에 따라 동정심, 감사, 사랑, 행복 등 긍정적 감정을 느끼는 수준이 달라지며 이 신경의 반응이 보살핌, 존경, 협동심 등 이타적 행동을 만든다고 한다.
결국 인간의 뇌에는 선의 작동 장치가 보편적으로 심어져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착함'으로 가장 강력한 범야권 대선 주자의 반열에 오른 안철수나 그의 착함에는 한참 못 미치는 기자 같은 사람도 적어도 바탕은 같다는 것, 즉 안철수만 착한 게 아니라는 얘기가 가능하다. 이런 생각은 엉뚱하게 비약하기도 한다. 안철수와 기자 같은 사람의 차이는 결국 착함이 현실에서 발현되기 위한 조건을 갖추고 있고 없고의 차이가 아닐까?
물론 안철수의 착함을 폄훼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는 착해 보인다. 컴퓨터 바이러스 백신을 개발해 무료로 배포했고, 종업원에게 주식을 나눠줬으며 재단을 만들어 부의 사회 환원이란 대의를 실천했다. 재단을 만든 것을 두고 대선 출마를 위한 포석이란 소리가 나오기는 하지만 어쨌든 1천500억 원을 내놓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렇게 착한 일만 하니 생각도 착하지 않을 수 없다. '안철수의 생각'은 이런 착한 생각들로 꽉 차 있다. "저는 지금까지 인생의 큰 전환기마다 '내가 우리 사회의 긍정적인 변화에 얼마나 보탬이 될 수 있을까'를 판단 기준으로 삼고 결정을 내렸습니다"라는 대목에 이르면 착함을 넘어서 거룩해 보이기까지 한다.
그런데 기자의 고약한 심성 때문인지 언제부터인가 슬슬 질리기 시작했다. 너무 완전무결해 보이다 보니 그는 기자처럼 평범한 사람이 범접할 수 없는 그 무엇처럼 느껴져서다. '안철수 현상'의 시발점이 된 청춘콘서트는 이를 잘 보여주는 듯하다. 수많은 상처받은 청춘을 내려다보며 위로의 말을 쏟아내는 그의 모습은 청중과 평등하지 않아 보였다. 한없이 겸손한 모습이었지만 그 겸손이 그를 위로받는 청춘들 위에 있는 어떤 존재로 만드는 듯했다면 기자의 오버일까.
착함을 현시하는 방식도 그렇다. 그는 결코 자신의 착함을 자랑하지 않는다. 매우 겸손하게 자신의 착한 생각을 펼쳐보인다. 이런 겸손은 그의 착함에서 뿜어나오는 아우라를 더욱 눈부시게 만든다. 그러다 보니 기자의 생각은 그의 겸손이 진정한 겸손이 아니라 모종의 목적을 위한 고도의 연출이 아니냐는 식으로 뒤틀리기 시작한다. 기자의 뒤틀린 생각이 정말로 뒤틀렸다면 용서하시라.
간디는 피비린내 나는 살육을 벌이는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에게 이렇게 외쳤다. "복수를 원합니까. '눈에는 눈'을 바랍니까. 그렇다면 인류는 모두 장님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인류는 눈이 멀쩡한 사람이 더 많다. 악한 사람보다 착한 사람이 더 많다는 증거다. 세상에는 안철수처럼 착한 사람이 많다. 그들은 '안철수'가 되고 싶어도 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착함을 자랑 말라는 얘기다. 그런데 얼마 전 그는 과거의 행적과 관련해 '사랑의 매'를 자청했다. 그는 정말로 그렇게 착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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