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경북 생존 독립유공자 장병하 옹의 광복절

입력 2012-08-15 10:46:46

"일제 잔혹사, 절대 잊혀져선 안돼"

대구경북 생존 독립유공자 14명 중 한 명인 장병하 옹이 광복 당시를 회상하고 있다.
대구경북 생존 독립유공자 14명 중 한 명인 장병하 옹이 광복 당시를 회상하고 있다.

"애국지사들이 하나 둘 고인이 됐어. 살아있는 동안 학생들이 민족의식을 가지도록 올바른 역사교육을 하는데 힘을 보태고 싶어…."

대구경북 생존 독립유공자 14명 중 한 명인 장병하(84'대구 달서구 상인동) 옹은 "애국지사들이 세상을 뜨면서 민족의 역사를 증언할 사람들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고 안타까워했다.

장 옹은 안동농림학교 3학년이던 1945년 3월 안동경찰서를 습격하고 안동 시민들에게 궐기할 것을 호소했다. 이후 일본 육군 기념일에 맞춰 하려던 거사를 논의하기 위해 전달한 편지가 일본 경찰의 검열망에 걸려 50여 명과 함께 경찰서에 끌려갔다.

장 옹은 감각이 없어질 때까지 곡괭이로 온몸을 두들겨맞고 손가락에 대나무침을 박는 모진 고문을 당했다.

그는 "광복 다음날이던 16일 교도소에 온 일본인 안동경찰서장이 무릎을 꿇고 나서야 비로소 독립을 실감했다"고 회상했다. 장 옹은 이후 교육계에서 활동하며 역사 교육에 앞장섰다.

독립유공자와 유족 모임인 광복회에서도 대구경북 생존지사 협의회장, 본부 이사 등을 맡으며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해 힘을 쏟았다.

그는 "이명박 대통령이 독도를 방문했을 때 정말 통쾌했다"면서 "내 나라, 내 땅을 밟는게 왜 문제가 되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장 옹은 서재에 쌓인 책 틈에서 두꺼운 책을 하나 꺼내놓았다.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에 반박하기 위해 수많은 자료를 수집하고 정리해놓은 것이었다.

광복 후 67년이 지나면서 그의 마음이 급하다. 일본강점기 때 시대상이 어땠는지, 국민이 어떤 고통과 수모를 겪었는지 알려줄 사람이 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공출에 맞추기 위해 굶고 허덕이던 때를 회상했다. "지금도 늦지 않았습니다. 나라 없는 설움이 어떤 것인지 생생하게 증언하고 자료로 남긴다면 후손도 잊지 않을 것입니다."

장 옹은 런던올림픽 축구 한일전을 보면서 수많은 생각을 했다. 국경일에 태극기를 달아놓은 집이 적어서 속상했던 장 옹은 목이 터져라 한국대표팀을 응원하는 '붉은' 젊은이를 보면서 새로운 가능성을 본 것이다.

"젊은이의 열정에 민족의식과 주권의식을 더한다면 국민 모두가 외교관, 애국지사가 될 것입니다."

이지현기자 everyday@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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