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마와 싸우기도 힘든데 가난마저…
은희진(가명'21'대구 남구 대명동) 씨는 시련을 일찍 겪었다. 그가 고등학교 2학년이었을 때 엄마(47)가 대장암에 걸렸고, 아버지(53)는 지나친 음주로 알코올성 치매 진단을 받았다.
희진 씨는 "2008년은 우리 가정이 와르르 무너진 해였다"고 말했다. 마음을 굳게 먹고 견뎌보려 애쓰지만 그를 둘러싼 주변 상황은 좀체 나아지지 않고 있다. 당뇨합병증으로 쓰러진 엄마는 삶과 죽음을 오가고 있으며 병원비는 점점 늘어만 간다.
◆엄마의 암
2008년 1월, 고등학교 2학년 겨울방학 때였다. 대구 남구 대명시장에서 막창집을 운영하던 엄마 친구가 "석 달만 가게를 운영해 달라"고 부탁했다. 항상 집에서 우리를 보살피고 아빠 때문에 힘들어하셨던 엄마에게도 '자기 일'이 생긴 것이다. 점포세를 내기도 빠듯한 처지에 아르바이트생을 쓸 수 없어 엄마는 혼자서 가게를 꾸렸다. 나도 학교 수업이 끝나면 곧장 가게로 가 엄마 일을 거들었다. 그때 엄마가 웃는 모습을 보았다.
어느 날 엄마가 갑자기 배를 움켜잡고 신음했다. 웬만해서 아픈 내색을 하지 않는 엄마가 걱정돼 "집에 가서 쉬라"며 집으로 돌려보냈다. 엄마를 혼자 보내놓고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엄마 휴대전화에 문자 메시지를 남기고, 집으로 전화를 걸어도 연락이 닿지 않았다.
식당을 뛰쳐나와 집에 도착했을 때 엄마는 배를 잡고 바닥에 데굴데굴 구르고 있었다. 대장암 때문이었다. 구급차를 타고 대학병원 응급실에 도착하자 의사들은 "당장 수술을 해야 한다"며 보호자를 찾았다. "저요. 제가 우리 엄마 보호잔데요." 병원에서는 수술을 하려면 수술 동의서에 서명을 해야 하는데 나는 미성년자여서 사인을 할 수 없다고 했다. 그때 막노동을 하는 아버지는 경북 포항에, 형(23)은 군대에 있었다. 결국 친척들이 병원에 와 서명을 한 뒤 엄마는 수술실에 들어갔다.
◆아버지의 치매
어린 시절 내 기억 속의 아버지는 항상 술에 취해 있었다. 평소에 말이 없었던 아버지는 술에 취하면 거칠어졌고 때론 엄마에게 폭력을 휘두르기도 했다. 내가 중학교에 들어간 뒤 폭력은 사라졌지만 술 때문에 아버지는 많은 것을 잃었다. 잦은 술로 아버지는 건강을 잃었고, 가족의 신뢰를 잃었다. 아버지는 한때 제약회사에 다녔지만 회사를 그만둔 뒤 전국을 돌아다니며 막노동을 했다. 엄마와 아버지가 싸우는 모습을 자주 보지 않아도 돼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하지만 객지 생활이 길어질수록 아버지의 건강은 더 약해졌다. 어느 날 아버지는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화장실을 눈앞에 두고 바지에 소변을 보기도 했으며, 갑자기 발작을 일으켜 온 가족을 놀라게 하기도 했다.
2008년 찾아간 병원에서 아버지는 '알코올성 치매' 진단을 받았다. 엄마가 대장암 수술을 받던 그 해였다. 아버지는 더 이상 우리 가족의 가장 역할을 할 수 없었고 엄마를 돌보는 것은 형과 내 몫이 됐다. 우리 가족이 기초생활수급자로 선정된 것도 그 무렵이었다. 아버지는 1년 중 6개월 이상은 병원에 입원해 알코올 중독 치료를 받는다. 과거 기억이 조금씩 희미해져 가는 아버지의 모습을 볼 때마다 내 마음은 무거워진다.
◆희진 씨의 무거운 어깨
이제 내가 진짜 가장이 됐다. 평일에는 병원에서 엄마를 간호하고 주말에는 뷔페식당에서 아르바이트를 한다. 한 달에 100만원 넘는 비용이 드는 간병인을 쓸 수 없어 형과 돌아가며 엄마를 간호한다. 3년 전 전문대 치기공과에 입학했지만 1학기를 끝낸 뒤 휴학을 해 둔 상태다. 언제쯤 학교를 졸업할 수 있을지, 군복무를 할 수 있을지 모든 것이 불투명하다. 올해 4월 병원에 입원한 엄마는 이제 다른 사람이 됐다. 당뇨합병증으로 혼수상태에 빠졌던 엄마는 세균에 감염되는 바람에 왼쪽 안구를 적출하는 수술을 받았다. 수술 뒤 뇌경색까지 겹쳐 한쪽 몸이 완전히 마비돼 혼자서 움직이는 것은커녕 말도 할 수 없는 상태가 됐다.
내 어깨를 가장 짓누르는 것은 엄청난 병원비다. 수술비와 넉 달간 병원비가 900만원 가까이 된다. 병원에서는 세균 감염 때문에 비싼 항진제를 사용해서 그렇다고 했다. 생계급여 80여만원과 아르바이트 수입으로는 생활비를 대기에도 빠듯하다. 뒤로 물러날 수도, 앞으로 나아갈 수도 없는 상황이다.
한때는 나를 둘러싼 모든 것들이 싫고 세상이 원망스러웠다. 벗어나려고 발버둥칠수록 우리 가족을 옥죄는 병과 가난이 싫었다. 다만 나를 유일하게 위로하는 것은 앞으로 이보다 더 큰 시련이 내 삶에 없을 것이라는 막연한 희망이다.
황수영기자 swimmin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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