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태흥의 이야기가 있는 음악풍경] '소양강 처녀'-70,80년대 누이들의 애달픈 연가

입력 2012-07-28 07:58:35

몇 년 전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주말 오후 팔공산 갓바위를 오르는 길옆에서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고 있는 아주머니들을 보았다. 절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기 때문인지 지나던 사람들 대부분이 눈살을 찌푸렸지만 나이가 드신 분들이라 참는 듯한 표정이었다. 마침 땀을 식힐 요량인지라 근처 바위 턱에 배낭을 내려놓고 앉아 그네들을 지켜보았다. 그들이 함께 박수를 치며 부르던 노래는 소양강 처녀였다. 노랫말처럼 팔공산 자락에 해거름이 들고 있는 탓이었을까? 아주머니들이 박수를 치며 부르던 그 노래는 그렇게 애절하게 다가왔다.

어쩌면 그랬으리라! 그들에게도 열여덞 어린 청춘이 빛나던 시간이 있었으리라! 어쩌면 짝사랑이었을지도 모르는, 아니 가난에 힘들었던 시절 운명 같은 시간들을 아파했을지도 몰랐다. 구태여 해 저문 소양강의 황혼이 아니더라도 갈대밭의 슬픈 두견이 아니더라도 살아온 날들에 대한 회한은 얼마나 가슴을 떨리게 했을까? 그 노래는 어쩌면 그렇게 절실하고 아픈 것인지 몰랐다.

이 노래의 작사자인 반야월(본명 박창오'1917~2012)은 "이 노래는 춘천 소양강에 살던 모든 처녀들을 주인공으로 쓴 것"이라고 밝혔지만 어쩌면 이 노래는 소양강 처녀가 아니라 1970, 80년대를 살았던 그 시대 모든 누이들의 애달픈 노래였는지 모른다. 사십 년 전쯤 초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선생님께서는 아이들에게 중학교 진학 여부를 물었다. 70명이 넘는 아이들 중에서 중학교를 갈 수 있는 아이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여자아이들 중에서 손을 든 아이들은 그야말로 얼마 되지 않았다.

그렇게 가난은 우리의 어린 누이들을 일터로 내몰았다. 결국 늘 가난을 입에 물고 살았던 큰누님과 작은누님도 인쇄소와 봉제공장에서 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큰누님은 "계집애가 무슨 공부냐"며 어머니에게 매를 맞아가며 공민학교라는 교회부설의 중학과정과 고등과정을 억지로 마쳤지만 결국 작은누님은 초등학교 과정조차도 제대로 이수하지 못했다. 해서 작은누님은 지금도 늘 관공서나 은행을 갈 때마다 부끄럽고 무섭다고 말씀하신다.

하지만 오래 시간 동안 못난 남동생은 누님들의 아픔을 알지 못했다. 아니 외면했다는 것이 더 맞는 말이다. 어쩌면 그들의 삶은 그들의 것이라고, 어쩔 수 없는 운명적인 것이라고 자신을 위한 가족들의 희생을 그렇게 합리화하며 살아왔다. 부끄럽게도 자신조차 돌아보지 못하면서 세상을 바꾸겠노라고 큰소리치며 살았다.

마치 불에 데인 것처럼 소양강 처녀라는 노래가 그저 모든 것을 감내하면서 소리 내지 않고 살았던 우리 누이들의 연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들의 소양강 처녀는 다른 노래와는 달리 서너 번 반복되었다. 아주머니들은 모두 즐거워했지만 지켜보는 이의 가슴은 그렇게 쓸쓸하기만 했다.

일주일 뒤, 노래를 부르던 그 자리에는 철조망이 쳐지고 출입금지와 함께 고성방가 금지라는 팻말이 붙어 있었다. 오래된 일기장 속에서 부끄러운 기억들을 끄집어내는 것처럼 아팠다. 통제와 감시는 모든 것을 음지로 내몬다. 더구나 그것들이 대중에게 일상화되면 당연시되고 진실이 되기 마련이다. 좁은 공간에서 화려한 조명과 시끄러운 반주로 점수를 매기는 노래방 문화의 뒤끝이 개운하지 않은 이유다.

그 후로도 꽤 오랫동안 갓바위를 올랐지만 한 번도 고성방가(?)를 듣지는 못했다. 늘 감추는 것에서 잘못이 일어난다는 생각은 불온한 것일지 모른다. 소양강 처녀가 발표되었을 때, 어떤 이들은 반야월 씨가 쓴 가사를 두고 두견새는 갈대밭이 아니라 숲에서만 울고, 소양강에 무슨 동백꽃이냐며 문제를 삼았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이 노래가 대중의 뜨거운 애정을 받는 데 아무런 장애가 되지 못했다.

갓바위 오르는 길, 출입금지의 철조망과 고성방가 금지의 팻말의 불편한 속내는 틀에 맞춰 재단하는 소위 선진 문화라는 낯선 이름 탓이다. 요즘 젊은 가수들의 노래는 세태를 반영하듯 너무나 빠르고 선언적이다. 일등과 최고를 강요하는 사회에서 추억은 구태의연하다. 하지만 어찌 젊고 새로운 것만이 미덕일 수 있으랴? 우리에게도 사랑이 있다고 우리에게도 젊음이 있었다고 소양강 처녀는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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