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의 인물] 임오군란으로 청국에 납치된 흥선 대원군

입력 2012-07-23 07:46:07

왕족 흥선대원군 이하응(1820~1898)은 안동 김씨 세도로 불우했다. 아들(명복)이 철종 사후 1863년 12세에 고종으로 즉위하면서 권세를 잡았다. 그는 섭정과 쇄국정책으로 조선의 재건을 꾀했다.

그러나 1873년 고종의 친정(親政) 이후 명성황후 집안의 권력 장악으로 실권을 잃었다. 재기는 1882년 오늘 일어난 임오군란 때였다. 1876년 강화도 조약 이후 신식 군대와 구식 군대 간 차별에 불만이던 구식 군인들은 폭동을 일으켜 그에게 대책을 호소했다. 폭동으로 일본군 교관 호리모토 레이조(堀本禮造) 소위가 피살됐고 일본 공사관이 습격받았다. 그는 재집권했으나 명성황후 일파 요청으로 개입한 청(淸)의 납치로 그의 재기는 좌절됐다. 그 후 부침을 거듭하다 1895년 며느리 명성황후 시해로 은퇴했다.

한편 임오군란은 되레 일본과 청의 영향력만 늘린 꼴이 됐다. 일본은 난을 구실로 군 병력을 멋대로 경성 민가에 주둔시켰다. 임란 후 첫 일본군 경성 진입이었다. 특히 난 때 일본 공사관을 지키던 무관 미즈노 가츠키(水野勝毅) 대위가 읊은 시는 섬뜩했다. '나에게 3척 보검이 있으나/몇해도록 피 맛을 보지 못했다/오늘밤 경성 한 바탕 꿈에/번개처럼 날며 개 염소를 죽이리라.' 뒷날 일본은 그의 시처럼 조선인을 마치 '개와 염소 죽이듯' 했고 조선을 통째로 삼켰다.

정인열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