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삿속이냐 지적 유희냐 '人'빠져 길 잃은 人文學

입력 2012-07-21 00:08:00

기업도 학교도 "퓨전시대 지식적 소양 활용" 주입식 교육 열풍

몇 년 전부터 '인문학'이 유행이다. 감히 학문의 흐름에 대해 '유행'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정말로 유행이다. 학계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가 각자의 영역에 인문학을 접목시키려 하고 있는 것.

기업 경쟁력을 높이겠다며 유명 강사를 초빙해 직원들을 대상으로 인문학 강연을 여는 것이 하나의 기업 문화 트렌드가 됐다. 동네 도서관이나 문화센터 등에서 마련한 인문학 강좌를 통해 일반 시민들도 인문학을 경험하고 있다. 대학에 가기 위해 수험생들은 논술에 더해 인문학 강의를 따로 더 듣고 있다.

하지만 너도나도 유행을 좇다 보면 피곤해지는 법이다. 요즘 "인(人)문학에 사람(人)이 결핍됐다"는 반응이 여기저기서 나오고 있는 것. 행복하게 살기 위해 인문학에 접근하지만 달달 외우고 공부하느라 지친단다. 또 남들에게 인문학이라는 '고급 교양'을 향유하는 모습을 연출하느라 피곤하단다. 기업에서는 인문학을 마케팅 도구로 활용한 지 오래다. 이전의 교양 강좌를 인문학으로 포장해 판매하는 사례도 나온다. 그러면서 인문학을 제대로 즐겨보자는 대안적 움직임이 나오고 있다.

인문학 열풍과 그 이면의 우리 사회 모습을 살펴봤다.

◆인문학 열풍 세태

국내 한 인문학 관련 웹사이트에 접속해봤다. '인문학 고전 30선'이라며 유명 강사들의 강의 내용이 담긴 동영상을 할인된 가격에 서비스한다는 공지사항이 맨 먼저 화면에 떴다. 이곳 웹사이트 디자인과 메뉴는 토익이나 수능시험 강의 동영상을 서비스하는 웹사이트와 판박이였다. 이곳에서 내세우는 서비스의 핵심은 인문학을 온라인과 모바일로 '학습'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인문학은 사실 일방적으로 '학습'당하는 것이 아니다. 고대 그리스시대부터 인문학은 쌍방의 '묻고 답하기'가 중심인 토론 학문이었다. 그럼에도 인문학이 지금과 같은 학습 위주 열풍에 휩싸인 것은 무슨 이유일까.

우리나라에서 인문학이 유행한 계기는 전 애플 CEO(최고경영자) '스티브 잡스' 때문이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아이폰이 성공하며 스티브 잡스가 이끄는 애플사의 성공 신화가 우리나라에도 전해졌다. 그러면서 스티브 잡스는 언론을 통해 "인문학 소양이 자신의 사업적 성공의 뿌리였다"고 밝혔다. 이후 스티브 잡스처럼 성공하고 싶은 우리나라 CEO들이 인문학에 관심을 갖게 됐다는 것.

기업들은 너도나도 사옥 강당에 유명 강사들을 초빙해 직원들을 대상으로 인문학 강좌를 열었다. 또 직원 채용 과정에서도 이전에는 잘 뽑지 않던 순수 인문학 전공자들에게 문을 열었다. 지난해 삼성전자가 인문학 소양을 갖춘 소프트웨어 전문가를 대거 뽑겠다고 공식 표명한 것도 한 예다.

인문학 열풍은 동네로 퍼졌다. 공공도서관이나 민간 문화센터 등에서 인문학 강좌 개설에 열을 올린 것. 주민들은 높은 관심을 보였다. 그러면서 학교와 부모들은 아이들에게도 인문학을 강권했다. 기존 논술에 인문학 교육을 더한 것. 사회는 이미 "인문학은 대학 전형에도 유리할 뿐만 아니라 대학 졸업 후 취업에서도 필수 종목"이라고 떠들고 있었으니 말이다.

◆지쳐버린 인문학

이 정도까지였다면 인문학은 '우리 사회를 건강하게 살찌우는 영양제' 정도로 비쳤을지 모른다. 하지만 인문학 열풍이 과도한 양상을 보이면서 그 본질을 벗어난 쓰임도 나타나고 있다.

기업에서는 인문학 유행이 퍼진 이후 관련 강의를 신청하는 직장인들이 늘고 있다. 얼핏 보기엔 사회적 흐름에 동참하는 것으로 비칠지 모르지만 억지로 따라가는 경우가 적잖다. 기업이 기존 업무능력에 인문학적 소양을 더한 '융합형 인재'를 거론하면서 인문학 강좌 수강을 자격증처럼 요구하고 있는 것. 직장인 장모(29'대구 중구 대봉동) 씨는 "금융계에 종사하며 관련 자격증을 따는 데 주말을 반납하고 있다. 그러다 최근 회사에서 인문학 관련 동영상 강의도 들으라고 했다. 공부할 종목과 스트레스만 늘었다"고 푸념했다. 기업에서 바리스타, 소믈리에 과정 등을 추천하기도 하지만 이는 기존 취미 과정으로 불리던 것을 인문학 과정으로 포장한 것에 불과하다.

백화점은 인문학 강좌를 개설해 고객을 그러모으는 마케팅 수단으로 활용하기도 한다. 최근 모 백화점에 따르면 올해 인문학 강좌 수강생이 지난해 대비 20% 이상 늘었다. 백화점을 찾는 30대 이상 여성 VIP 고객들이 여가 시간을 인문학 강좌를 듣는 데 쓴다는 것. 그러면서 이들을 백화점 안에 묶어 두며 쇼핑이나 식사 등으로 연결해 매출을 발생시킨다는 것이다. 또 기존 교양 강좌를 이름만 바꿔 인문학 강좌로 포장하기도 한다. 주부 박모(45) 씨는 "지난해 백화점에서 듣던 스피치(말하기) 능력 수업이 이름만 '인문학 스피치'로 바뀌었다. 강사와 강의 내용은 변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즐기는 인문학

이달 16일 오후 대구 중구 화전동 '인문학 놀이터'. 한쪽 테이블에는 젊은 남녀 4명이 스페인어 공부에 한창이었다. 오후 8시 30분쯤 다른 한쪽 테이블에도 계명대 기독교학과 김재연 교수를 비롯한 젊은 남녀 4명이 자리를 채우더니 '성서 인문학으로 읽기' 모임을 시작했다. 모임 이름 그대로 성경책을 읽고 그 내용을 다양한 시각으로 바라보고 토론하는 인문학 모임이다.

이 모임의 분위기는 자유분방했다. 농담과 웃음을 섞어가며 떠들썩하게 토론을 하다가도, 이내 차분한 분위기 속에서 책읽기에 집중했다. 그리고 가르치는 사람과 배우는 사람이 따로 있지 않았다. 김 교수는 단지 모임의 사회자 역할을 하고 있을 뿐이다. 학습, 연구, 담소, 놀이 등 어떤 형식 틀로도 규정지을 수 없는 인문학 모임의 묘미를 확인할 수 있었다.

올해 4월에 문을 연 인문학 놀이터는 최근 이러한 소규모 인문학 모임이 여럿 열리고 있는 곳이다. 이곳은 인문학 모임을 가지는 사람들에게 공간을 제공하고, 인문학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에게 모임을 연결해주는 '인문학 허브' 역할을 하고 있다. 박선미(33'여) 대표는 "서울에는 '수유너머' 등 연구 공간으로 출발해 대중들이 인문학을 즐기는 공간으로 발전한 곳이 적잖다. 하지만 대구에는 마땅한 공간이 없어 마련하게 됐다"며 "인문학에 관심을 갖고, 특색 있는 주제로 인문학 모임을 가지려는 사람들이 많이 문의를 해 놀랐다"고 말했다.

지역에서도 인문학 강좌가 적잖게 열리고 있지만 이에 다소 염증을 느끼고 소규모의 자발적인 인문학 모임을 가지려는 사람들이 많다는 얘기다. 김 교수는 "1만원을 주고 책 한 권만 사면 인문학 모임을 하며 1년을 즐겁게 보낼 수 있다. 최고의 취미"라고 말했다. 그는 "책 내용을 탐구하는 것 외에도 다양한 사람들을 사귀며 인문학의 본질인 '인간에 대한 이해'를 쌓는다"며 "보통의 대화는 피상적이지만 책을 매개로 한 대화는 깊숙한 맛이 있다"고 말했다.

◆'지식 쌓기'에서 '관계'로

영남대 일어일문학과 최범순 교수는 일제강점기의 대구를 기록한 일본 문헌을 찾고, 책 속 내용을 추적하는 연구를 하고 있다. 그런데 이 연구는 대학교 밖에서 이뤄지고 있다. 더구나 연구에 참가하고 있는 사람들은 교수 등 전문 학자들이 아니다. 대학생, 주부, 건축가, 대구에서 살고 있는 일본인 등이 최 교수와 함께 인문학 모임을 갖고 있다. 최 교수 스스로 다양한 사람들로부터 새로운 시각을 얻기 위해 대학 연구실 밖으로 뛰쳐나온 것이다.

'모든' 사람에 대한 탐구가 본질인 인문학의 향유층 역시 모든 사람으로 넓히려는 시도도 나오고 있다. 인문학 열풍이 실은 돈과 시간적 여유가 있는 중산층 이상의 교양 프로그램 유행에 불과하다는 비판에 따른 것이라는 분석.

'노숙인 인문학자'로 불리는 최준영 작가는 노숙인들을 대상으로 인문학 강의를 한다. 일방적인 강의가 아니라 노숙인들과 같이 술도 마시고 고민하며 인문학을 탐구한다. 직업도 가지각색이고, 학력이나 세대도 서로 다른 노숙인들과 소통하려면 길거리의 삶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 그러한 접근 자체가 이른바 '거리의 인문학'이라는 것.

그러면서 새롭게 발견되고 있는 인문학의 가치가 바로 '관계'다. 인문학 놀이터 박선미 대표는 "정보화 시대에 많은 양의 정보가 쏟아지며 일상의 문제를 해결하는 일은 이전보다 쉬워졌다. 하지만 현대인들은 자신의 문제를 완벽하게 해결하지는 못하더라도 주변 사람들과 함께 고민하는 경험을 얻기를 바란다"며 "그래서 현대인들이 관계의 가치를 되찾기 위해 본능적으로 인문학을 찾고 있다. 앞으로 인문학 관련 모임, 출판, 행사 등에 대한 접근도 '지식 쌓기'보다는 '관계'에 방점을 둬야 할 것"이라고 분석했다.

황희진기자 hhj@msnet.co.kr

최신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