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춘추] 접시꽃

입력 2012-06-22 07:03:46

매화, 산수유, 수양버들이 분홍, 노랑, 연두색 물감으로 수채화를 그리기 시작해서 진달래, 개나리가 온 산하를 물들이는가 싶더니 어느새 벚꽃과 복사꽃, 아카시아, 이팝나무까지 봄을 매질하듯 다그치며 피고 진다. 이 정도면 꽃들도 숨 고르기가 필요한 것이 아닐까. 넝쿨장미의 화려함을 끝으로 꽃소식이 뜸 한가했더니 흰색, 자주색, 분홍색, 붉은색의 섬세하면서 잘 생긴 접시꽃이 당신처럼 시원스럽게 피기 시작한다.

예부터 접시꽃은 주로 사립문 옆에 심어 집을 지키게 했던 꽃이다. 초가의 토담 길을 따라 얼굴을 빼꼼 내미는 접시꽃에 대해서는 웬만하면 누구나 아스라한 그리운 추억을 한 두 꼭지는 간직하고 있다.

어릴 적 벌이 들어간 접시꽃을 오므려 꽃잎 통째로 떼어내 그걸 귀에 대 보면 앵앵거리며 움직이는 벌의 활달함이 놀라웠다. 훗날 어른이 되고도 벌의 그 활달함은 가슴에 남아 어쩌면 오늘의 부지런도 그런 활달에 기원을 둔 것이 아닌가 자문해 보며 혼자 배시시 웃곤 한다.

가난했던 시절의 추억들이다. '가난도 비단 가난'이라고 그런 접시꽃을 보며 언행을 함부로 가지지 않으려는 순박함이 흠씬 밴 꽃이다. 접시꽃은 대부분의 꽃들이 가진 그런 진한 향기는 없지만 시골의 담벼락 언저리에 고즈넉하게 서서 누가 보든 말든 늘 항상심으로 그 자리에서 피고 진다. 그래서 더욱 소박하고 꾸밈없는 꽃으로 사랑받아 왔다.

신라시대 학자인 최치원도 접시꽃의 또 다른 이름인 '촉규화'라는 시에서 자신을 눈여겨 봐주지 않는 윗사람들에 대한 서운함과 아쉬운 마음을 노래했다. 쓸쓸히 피어 있는 접시꽃이 자신을 닮았다고 하는 걸 보면 그 당시에는 고을마다 흔하게 피었던 꽃으로 여겨지지만, 외래종이 넘치는 요즘은 그렇게 흔치도 않다. 그러나 지난 2005년 도종환 시인의 시집 '접시꽃 당신'이 세상에 나오면서 접시꽃은 부랴부랴 더 새로운 모습으로 많은 사람에게 사랑을 받게 되었다.

접시꽃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빛나는 별을 가슴 속에 하나씩 가지고 살아가는 꽃임을 알 수 있다. 마치 마음 속의 행복의 별인양 피어 있는 접시꽃. 뻐꾹새 소리 들으면서 자라고 꽃 피우다 뻐꾹새가 떠날 때쯤이면, 저 높은 곳에서 더 이상 매달려 있기가 힘들어 꽃잎 오므리고 통째로 툭 떨어지고 마는 꽃이다.

그 어떤 꽃인들 생에 대한 미련이 없을까.

접시꽃은 누가 뭐라 해도 머무를 때와 가야할 때를 잘 아는 멋쟁이 꽃이 아닐 수 없다.

김해숙-다사꽃화훼단지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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