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직토크<80>] 들국화 재결성 (하)

입력 2012-06-21 14:09:47

한국 록 정신의 전설, 25년 만에 돌아왔다

언더그라운드에서 활동하던 전인권은 1980년 고등학생이던 허성욱을 만나 함께 활동한다. 두 사람은 여러 밴드를 전전하면서 카페 등을 중심으로 활동했는데 양병집이 운영하던 카페 '모노'에서 최성원을 만나게 된다. 최성원은 '그리운 금강산'을 작곡한 최영섭의 아들인데 1970년대부터 스튜디오 세션 기타리스트로 활동했다. 세 사람은 록밴드를 만들기로 의기투합했고 여기에 기타리스트 조덕환이 가세한다. 조덕환이 가세하기 전 밴드는 '전인권 트리오'라는 이름으로 활동했는데 '블루스카이'를 거쳐 '들국화'를 공식 명칭으로 정한다.

들국화가 마니아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984년 12월에 있었던 음악페스티벌 '젊은이의 록 사운드'를 통해서다. 참가한 밴드 대부분이 카피곡을 주로 연주했던 데 비해 들국화는 '행진'이나 '그것만이 내 세상'같은 자작곡을 부르며 폭발적인 반응을 이끌어 낸다.

자신감을 얻은 들국화는 이듬해 파랑새소극장에서의 단독공연을 가지면서 신화의 시작을 예고한다. 또 콘서트 문화가 보편적인 정서가 아니던 시절, 들국화는 새로운 문화를 만들기도 한다.

1985년 9월, 들국화는 한국대중음악사에 길이 남을 데뷔 앨범을 공개한다. '행진'을 시작으로 수록곡은 모두 히트를 기록했고 앨범은 그 해 30만 장이라는 판매고를 올린다. 하지만 앨범의 성공을 보기도 전에 기타리스트 조덕환이 미국으로 떠났고 그 자리에 손진태, 최구희, 주찬권이 들어오게 된다. 이들은 데뷔 앨범의 녹음에 참여했기 때문에 이질감 없이 함께할 수 있었다.

데뷔 앨범의 성공과 1986년 전국투어의 의미는 상당했다. 86아시안게임과 88서울올림픽 준비로 사회는 활기찬 듯 보였지만 청년들은 희망없는 하루하루를 보내던 시절이었다. 이런 시기 문성근과 강신일이 무대에 올린 '칠수와 만수'는 한국 사회와 정치현실을 비판하면서 청년들의 응어리를 일정 부분 해소해 주고 있었다. 여기에 들국화가 불을 지피게 된 것이다.

하지만 2집 앨범의 상업적 실패와 개성 강한 멤버들의 갈등으로 1987년 팀은 해체의 수순을 밟게 된다. 표면적으로 1년 동안의 휴식기를 가진다고 했지만 팬들은 해체로 여겼다. 이후 멤버들은 솔로와 독자적인 밴드 활동을 병행하게 된다. 그러던 중 1997년 11월 허성욱이 캐나다에서 교통사고로 타계했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들국화 멤버들이나 팬들 모두에게 충격을 준 소식이었고 멤버들은 추모 공연을 준비한다. 이 공연은 들국화의 재결성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닐까 하는 기대를 낳게 했고 실제로 어느 정도 진행이 되었지만 끝내 성사되지는 못한다.

들국화가 해체된 지 25년의 시간이 흘렀다. 짧은 활동 기간이었지만 들국화가 한국 대중음악계에 전해 준 의미는 거대하다. 그들은 암울한 시대의 대중들에게 청년과 사랑의 의미를 록으로 승화시켜 전했다.

그런 점에서 그들의 재결성은 80년대를 추억하는 의미가 아니라 진정한 전설의 귀환이다. 들국화의 재결성에 경의를 표한다.

권오성 대중음악평론가 museeros@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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