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종때 국모 인현왕후, 장희빈 간계로 폐서인 청암사서 3년 간 은둔
최근 한 케이블 TV에서 '인현왕후의 남자'라는 프로그램이 방영돼 인기를 끌었다. 남자 주인공은 폐서인된 인현왕후의 복위를 도모하던 중 죽을 고비에서 부적의 힘으로 2012년 현재로 오게 되면서 목숨을 건진다는 줄거리다. 인현왕후의 복위는 성공시키나 사가에 머물던 인현왕후가 부적절(?)한 행동을 했다는 모함을 받아 결국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기에 이르렀지만 부적의 힘으로 현재로 돌아와 새로운 삶과 사랑을 찾는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된다. 다소 황당무계한 내용이지만 '시공을 초월하는 사랑'이라는 명제는 시청자들의 눈을 드라마에 붙잡아 놓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수도산 청암사에는 인현왕후와 관련된 이야기가 전한다. 인현왕후가 폐서인된 후 이 절에서 3년간을 머물다 복위돼 궁으로 돌아간 역사의 현장이다. 궁으로 돌아간 왕비는 청암사에 서찰을 보내 고마움을 표시했다. 이런 인연으로 구한말에는 궁녀들의 시주로 불사를 일으켜 지금 가람의 모습을 찾을 수 있도록 했다는 기록이 전한다.
◆와우형 명당 터인 청암사에는 푸른 이끼 무성하고
청암사는 증산면 평촌리 장뜰마을 뒤 수도산으로 들어가는 초입에 자리 잡고 있다. 국도 3호선을 따라 평촌리 입구에 이르면 '불령산(佛靈山) 청암사(靑巖寺)'라는 돌로 된 이정표가 길손을 맞는다. 불령산은 수도산의 또 다른 이름이다. 수도산에 부처님의 영험과 가호가 끊이지 않아 근래 들어 불령산으로 불리고 있다. 더구나 수도암 석불 이마에서 자주 방광(放光:빛을 내어 멀리 뻗어나감)이 있어 불령산으로 불린다고도 한다. 이정표를 따라 1.5㎞쯤 들어오면 일주문이 선객을 맞이한다. 일주문의 현판인 '佛靈山 靑巖寺'는 성당(惺堂) 김돈희(金敦熙)의 글씨다. 주변에는 수백 년 됨 직한 아름드리 소나무'전나무가 울창하게 서 있다. 원래 이곳 적송은 목재로 이름났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때 이어 근년에도 벌채 허가가 나면서 아름드리 나무들이 모두 베어졌다. 다행히 절 인근에는 스님들이 노송의 벌채를 막으려고 나무에 몸을 묶어 몸으로 버틴 덕분에 오늘날까지 노송의 모습을 볼 수 있게 됐다고 한다.
일주문을 조금 지나치면 천왕문이다. 이곳에서 찻길은 왼쪽으로 새로 난 길로 향하고 걷는 이는 오른쪽 좁은 길로 가도록 했다. 천왕문을 통해 조금 오르면 오른쪽 길옆에 있는 옹달샘을 만난다. 우비천(牛鼻泉) 또는 코샘이다. 청암사는 소가 왼쪽으로 누워 있는 와우형의 형상이다. 대웅전 자리가 소의 뿔이고 이 샘은 소의 코 부분에 해당한다. 본디 소의 코는 항상 촉촉하게 젖어 있어야 하며 마르면 소가 병이 있다고 한다. 청암사 사세(寺勢)가 번창하고 나라가 태평할 때는 우비천의 물이 많이 고여 넘쳐흘렀다고 한다. 그런데 천왕문 앞으로 다리를 놓아 찻길을 내고는 우비천 샘물이 말라버려 모두를 안타깝게 했다. 이는 찻길을 낸 자리가 누워 있는 소의 목에 해당하는데 목 위로 수시로 차와 사람이 밟고 지나다니기 때문에 소가 아파 우비천의 샘물이 말랐다는 것. 또한 샘물을 마시면 부자가 된다는 속설이 있어 물욕을 경계해야 하는 스님들은 샘 앞을 지날 때 고개를 돌리거나 부채로 가려 외면했다는 말이 전한다.
천왕문을 지나 계곡으로 난 오솔길을 따라가면 계곡 좌우로 푸른 이끼가 뒤덮인 웅장한 바위벽을 만나게 된다. 청암사라는 이름은 '푸른 이끼가 바위를 덮어 푸른 바위'에서 유래했다. 하지만 바위에 어지럽게 음각한 이름들은 찾는 이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절에 시주를 많이 한 불자 이름을 새긴 듯한데 지나는 사람마다 한마디씩 던지는 책망의 억겁을 어찌 감당할까 하는 생각이다.
◆ 화재가 잦아 중창과 불사를 거듭한 청암사
바위 사이를 지나자 사찰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극락교 다리 입구에는 왼쪽으로 범종(梵鐘)'법고(法鼓)'목어(木魚)'운판(雲版) 등 법전사물을 모신 전각이 있다. 석탄일이 며칠 지나지 않은 때문인지 다리 난간을 따라 연등이 걸려 있다. 10여m 다리 아래로 수도산에서 발원한 명경지수 계곡물이 소리를 내며 흘러내려 산사의 정적을 깨뜨리고 있다.
사적에 따르면 "청암사는 수도암과 함께 도선국사의 비보사찰(裨補寺刹)로 건립됐다"고 한다. 창건 이래 여러 차례의 화재로 소실되고 중창되는 일이 반복됐다. 1647년(인조 25년)에 불이 나 전소됐는데 성총화상(性聰和尙)이 소식을 듣고 허장대사로 하여금 청암사를 재건토록 했다. 1736년(영조 12년) 산사태로 문루가 유실되자 회암정혜(晦庵定慧'1685~1741)조사가 2차 중창을 이뤘다. 1782년(정조 6년) 4월에 다시 큰 화재가 발생해 육화료 등 모든 전각이 소실되자 신궁보전과 누각을 중건하였는데 이를 3차 중창이라 한다.
1905년(고종 9년) 주지 용각화상(龍覺和尙)이 보광전을 건립하다가 완성을 보지 못하고 입적하자 대운화상이 이를 완성하고 가야산 용기사로부터 청동42수관음보살상을 옮겨 봉안했다. 청동관음상은 1975년 도난당해 1992년 6월 목조42수관음보살을 조성하여 다시 모셨다. 청암사는 1911년 또다시 큰 화재로 모든 전각이 소실된다. 대운대사(大雲大師)가 이듬해부터 대웅전, 육화료, 진영각 등을 신축하고 1921년 중국 항주의 영은사에서 목조석가모니불상을 조성해 대웅전에 봉안하니 이를 4차 중창이라 한다. 이때 전국 각지에서 많은 시주가 있었다. 대운화상이 꿈에 빨간 주머니를 여인으로부터 얻는 꿈을 꾼 후에 서울에 갔는데 나이가 많은 한 보살이 전 재산을 시주하면서 자신이 죽은 후 3년간 염불을 해달라고 부탁하여 이로부터 불사를 일으켰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불교 강원으로 명성이 이어지고 있는 가람
다리를 건너 경내로 들어서자 파르라니 깎은 머리의 비구니 스님이 포행(布行'천천히 걸으면서 참선하는 것)을 하고 있다. 지금은 하안거 기간으로 비구니 스님의 수행처인 이곳은 고요한 정적만 흐른다. 청암사는 조선 때부터 불교 강원으로 명성을 얻었다. 강원의 효시는 조선 중기 때 회암정혜조사가 선원과 강원을 설립하면서 비롯됐다. 당시 청암사에 운집한 학인이 300여 명에 달했다. 이후에도 강원으로의 명성은 계속 이어져 일제강점기 때 박한영(朴漢永) 강백(講伯)이 강론할 때는 학승 수가 200여 명에 이르렀고 강고봉(姜高峰) 강백이 가르치던 1975년까지도 매년 40여 명에 달했다.
현재 강주인 의정지형(義淨志炯) 스님이 1987년 청암사비구니승가대학을 설립하면서 현재 100여 명의 비구니 스님들이 수행, 정진하는 도량으로서 옛 명성을 이어가고 있다. 2007년에 청암사율원을 개원하여 계(戒)와 율(律)에 대한 체계적인 교육의 공간을 마련했다. 대웅전 앞에는 4층 석탑이 자리한다. 대운대사가 성주의 논밭에 버려져 있는 것을 옮겨와 세웠다. 1층 4면의 몸돌에 암실을 만들고 불상을 조각했다. 탑 높이가 4.2m에 이르나 지붕돌에 비해 몸돌이 가냘퍼 불안전하게 보인다. 경북도 문화재 자료 제121호다.
◆인현왕후와 인연을 맺은 극락전
대웅전과 개울을 사이에 두고 극락전과 보광전이 있다. 극락전은 조선 숙종의 계비 '인현왕후'가 장희빈의 간계로 서인으로 강등되었을 때 청암사로 들어와 3년간 기거하며 복위를 기원한 곳으로 알려지고 있다.
인현왕후는 청암사에 몸을 의탁하고 있을 당시에 지금의 극락전 자리에 축각(祝閣)을 짓고 복위 기도를 올렸다고 한다. 비록 서인으로 강등됐지만 국모였던 인현왕후를 예우하기 위해 별도의 사대부가 한옥을 지어 모셨는데 지금의 극락전이다. 인현왕후는 훗날 복위돼 환궁한 후에 "큰스님 기도의 영험으로 내가 복권되었다"는 내용의 감사 편지를 보낸다. 의정지형 스님은 "인현왕후의 서찰은 3, 4년 전 산내 암자인 백련암에 전해 내려오던 것을 최근에 노스님이 발견, 직지사 성보박물관으로 보내 보관하고 있다"며 "고한 스님 앞으로 먹지에 금자로 써 보낸 서찰에는 향, 비녀 등 신물 3가지를 같이 보낸다는 내용이 있다"고 전했다. 인현왕후는 환궁 후 청암사 주변 수도산을 국가보호림으로 지정함과 동시에 사찰에 전답을 내렸다고 한다.
극락전을 중창할 때 나온 시주록에는 궁중 상궁들의 이름이 26명이나 올라 있어 인현왕후로부터 비롯된 청암사와 왕실과의 인연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런 인연으로 조선 말까지 상궁들이 수시로 청암사에 내려와 신앙생활을 했다. 영친왕의 보모로 김천고 설립자인 최송설당도 청암사 중창 불사를 위해 사찰에 많은 토지를 희사했다는 기록이 전한다. 극락전 뒤편 보광전은 인현왕후의 복위를 기원하는 원당으로 건립됐으나 폐전된 것을 1911년 대운대사가 궁궐의 많은 상궁들의 시주를 받아 42수관음상과 후불탱화 등을 조성해 모셨다.
글'박용우기자 ywpark@msnet.co.kr 사진'서하복작가 texcaf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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