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활의 고향의 맛] 목로주점 흙바람 벽

입력 2012-06-14 14:01:50

좋은 친구와 끈끈한 정, 그리고 정겨운 이야기가 있는 곳

나는 목로나 주막이란 낱말을 좋아한다. 설렘과 그리움도 사람의 마음을 훈훈하게 데워주는 단어라고 생각한다. 하나 더 보태자면 푸근함과 넉넉함도 이 반열에서 빠뜨릴 수 없다. 목로나 주막은 간단한 안주밖에 없는 선술집을 뜻한다. 좁은 널빤지를 길게 놓고 목침만 한 송판 의자에 쪼그리고 앉아 막걸리 한 사발에 한 보시기의 김치안주를 집어먹는 맛과 멋. 목롯집은 기생과 풍악이 있는 주청(酒廳)이나 주루(酒樓)에서의 풍류가 도를 넘어 난봉으로 기우는 그런 술판과는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그렇지만 멋의 무게는 주막이 훨씬 무겁지 않을까.

요정과 룸살롱이란 화려한 술집에서는 밀실 거래와 흥정이 있을 뿐 진정한 친구와 정겨운 이야기는 없다. "멋드러진 친구 내 오랜 친구야/ 월말이면 월급 타서 로프를 사고/ 연말이면 적금 타서 낙타를 사자/ 그래 그렇게 산에 오르고 그래 그렇게 사막에 가자"는 이연실이 부른 '목로주점'이란 노래에서 읽을 수 있듯이 목롯집에는 끈끈한 정과 사람의 냄새가 있고 살아가는 기쁨이 넘친다.

르네 클레망 감독의 '목로주점'(Gervaise)이란 영화는 경제공황이 밀어닥친 파리의 황량함과 암울함을 멋지게 그려낸 명화 중의 명화다. 나는 목롯집이 생각나면 마리아 셀이 여주인공으로 나오는 그 영화를 떠올린다. 그리고 의식의 착각이겠지만 이연실이 부른 '목로주점'을 영화의 배경음악쯤으로 생각하고 흥얼거리게 된다. 영화는 두 남자로 인해 불우한 삶을 살아가는 한 여인의 슬프고 아픈 이야기다.

첫 동거남은 남매를 낳고도 여자만 밝히는 바람둥이, 정식 남편은 술주정꾼, 주인공은 그 와중에서 만난 남편의 친구를 진정으로 사랑하지만 그와 그의 아들의 행복을 위해 떠나보낸다. 여주인공은 떠나가는 연인 부자를 기차역 모퉁이에 숨어서 바라보며 "내 인생을 짓누르는 고통 때문에 그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고 중얼거린다.

이 영화의 라스트 신은 단연 압권이다. 전 남편 격인 동거남도 떠나고, 남편은 병원으로 들어가고, 연인이었던 남편의 친구도 가버리고, 사랑하는 아들마저 어미 곁에 남지 않는다. 목로주점 한구석에서 넋을 잃은 듯 앉아 있는 주인공 곁에는 어린 딸만이 삶의 무게를 지탱해 주고 있었다.

비 오는 주말에 예천 삼강주막을 다녀왔다. 목로주점에서도 비가 쏟아지는 장면이 영화를 더 슬프게 만들더니 슬플 것 하나도 없는 삼강주막에도 비가 내리니 한결 운치가 있었다. 원래 비 오는 날은 따순 구들목에 앉아 기름이 동동 뜨는 막걸리에 파전이나 부추전을 안주로 시간과 너나돌이 하며 노는 멋도 보통 풍류는 아니다. 막걸리 한 주전자 5천원, 배추찌짐, 두부, 메밀묵이 각 한 접시에 3천원이다. "한 상 주이소"라고 소리를 지르면 세트로 나와 값은 1만4천원이다.

이곳 삼강은 낙동강과 내성천, 그리고 금천이 서로 만나는 곳이다. 예전에는 부산에서 소금배가 올라와 사공과 보부상들이 이곳 삼강주막에서 진을 치고 기다렸다. 주막 옆에 수문장처럼 버티고 서 있는 회화나무의 짙은 그늘은 물물교환 장소로 활용되기도 했다. 때로는 소금 짐을 부리는 인부들의 인력시장 구실도 톡톡히 하곤 했다.

사람이 모이는 곳에는 반드시 술이 있고 이야기가 없을 수 없다. 이 주막도 생긴 지가 100년이 좀 더 지났으니 숱한 이야기들이 일 년생 풀꽃처럼 피었다간 시들었을 것이다. 삼강주막의 주모로 들어앉아 구십 평생을 손님 치다꺼리로 세월을 보내다 지난 2005년 10월 타계한 유옥연 할머니가 바로 목로주점의 주인공인 제르베즈와 같은 존재는 혹시 아닐까.

현재 기껏 남아 있는 이야기는 할머니가 손님들에게 외상술을 주고는 혹시 잊어버릴까 봐 부엌 흙벽에 빗금을 그었다는 게 전부다. 과거에 있었던 사실만이 역사는 아니다. 역사학자 E. H. 카는 "역사는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규정하고 인간 역사는 관념의 변화에 따라 언제나 다르게 해석될 수 있으며 해석되어야 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바라기는 위대한 스토리텔러 한 사람이 나타나 삼강주막에 대한 전설 같은 이야기를 꾸며내고 임권택 감독 같은 이가 그걸 영화로 만들면 삼강주막이 '목로주점'과 같은 명화로 거듭날 수 있을 텐데. '삼십 촉 백열등이 그네를 타듯' 그렇게.

수필가 9hwal@hanmail.net

최신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