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울한 시대, 언더그라운드 흐름 만들어
1960년대 초반, 영국 리버풀에 있던 레코드숍 NEMS에는 이상한 손님들이 계속 찾아온다. 10대와 20대의 젊은 손님들은 낯선 이름의 밴드 음반을 원했지만 음반은 NEMS에 있을 리 없었다. 밴드는 아직 정식 음반을 발표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레코드숍 사장 브라이언 엡스타인은 밴드를 만나기 위해 케번 클럽으로 향했고 이후 밴드의 매니저가 된다. 바로 비틀스의 탄생이다.
1980년대 중반 한국 레코드숍에도 이상한 손님들이 찾아온다. 라디오에서 분명히 들었다며 음반을 원했지만 레코드숍 사장은 처음 듣는 밴드 이름이었다. 음반 도매상에 전화를 해 봐도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하지만 FM라디오와 다운타운에서는 계속 처음 듣는 목소리와 음악이 흘러나왔고 이내 레코드숍에도 음반이 깔리기 시작한다. 4명의 장발 남자들이 기괴한 표정을 짓는 음반 표지는 이후 1980년대 한국 언더그라운드를 상징하는 이미지로 자리했고 목소리는 시대를 상징하는 외침이 되었다. '들국화'의 탄생이다.
1980년대 음악 좀 듣는다는 청년들은 가요를 듣지 않았다. 어차피 사전검열 때문에 제대로 된 노래를 발표할 수도 없었지만 암울한 시대 상황 속에서 가요는 온통 사랑타령만 해댔다. 젊은 대중들은 팝송에 귀를 기울였고 금지곡이 온전히 실려 있는 불법음반(빽판)을 선호할 정도였다. 이런 시기에 등장한 들국화의 폭발력은 엄청났다. 수많은 팝송팬들을 일시에 가요팬으로 만들더니 1980년대 중반을 규정하는 언더그라운드라는 흐름을 만들었다.
데뷔 앨범에 수록된 '그것만이 내 세상' '행진' '세계로 가는 기차' 같은 곡들은 당시 청년들의 송가가 되었고 앨범에 수록된 모든 곡이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 조용필을 제외하고 음반 판매가 부진하던 상황에서 60만 장이라는 판매고를 올렸고 2000년대 들어 평단이 선정한 한국대중음악 100대 명반에서 1위를 차지하게 된다.
들국화 효과는 음반을 넘어 라이브 콘서트라는 새로운 문화 현상을 만들기도 한다. 이전까지 리사이틀이나 디너쇼처럼 성인을 대상으로 한 '쇼'만 있던 시절 들국화는 대중들과 직접 만나고 호흡하는 콘서트를 통해 자신들을 알린다. 소극장부터 대학 강당 같은 큰 무대까지 들국화 콘서트는 매진 행렬을 이어간다. 특히 서울 신촌에 있었던 한 백화점 옥상에서 장기간 가진 콘서트는 마치 비틀스의 루프 콘서트를 연상시키며 화제가 되었다.
TV에 전혀 출연하지 않으면서도 대중들의 폭발적인 지지를 이뜰어 낸 들국화의 시작은 1980년대 초반부터였다. '따로 또 같이'에서 활동하던 전인권과 피아니스트 허성욱은 포크록을 지향한 듀엣을 만들고 들국화라는 이름으로 음악을 시작한다. 여기에 베이시스트 최성원과 기타리스트 조덕환이 합류하며서 록밴드 들국화가 탄생한다.
권오성 대중음악평론가 museeros@gmail.com
댓글 많은 뉴스
이재명 90% 득표율에 "완전히 이재명당 전락" 국힘 맹비난
권영세 "이재명 압도적 득표율, 독재국가 선거 떠올라"
[우리 아기가 태어났어요]신세계병원 덕담
"하루 32톤 사용"…윤 전 대통령 관저 수돗물 논란, 진실은?
'이재명 선거법' 전원합의체, 이례적 속도에…민주 "걱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