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40 광장] 절망에 대처하는 담쟁이의 자세

입력 2012-06-12 10:58:02

문득 담쟁이가 그리워지는 날이 있다. 살아가는 일이 다소 버겁게 생각되는 날이나 일이 생각대로 잘 풀리지 않을 때가 그렇다. 그런 날은 잠시 일을 접어두고 밖으로 나와 한참 동안 담쟁이를 바라본다.

담쟁이의 초록은 붉은색 벽돌과 대조를 이뤄 더욱더 선명하게 보인다. 초록의 정서는 생명과 맞닿아 있다. 그래서 희망의 색깔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초록일 것이다. 그 많은 초록 빛깔 가운데 유난히 담쟁이의 초록이 더욱 매력적인 것은 마치 추상표현주의 화가처럼 벽을 온통 초록으로 바꿔놓는 데 있을 것이다. 만약 뿌리를 내릴 벽만 있다면 담쟁이는 아마 하늘까지 오를 수 있을 것만 같다. 담쟁이가 그리운 것은 지칠 줄 모르는 그런 푸르른 생명력과 그것이 주는 감동일 것이리라.

담쟁이는 결핍을 사랑하기로 했을 것이다. 누구나 풍요로운 대지와 안락한 땅을 꿈꿀 것이다. 하지만 담쟁이가 사랑해야 하는 것은 아무도 뿌리내리고 싶지 않은 쓸쓸하고 차가운 벽. 희망의 근거가 빈약하기만 한 지점이다. 바로 그곳에서 담쟁이의 영토가 시작된다. 결핍의 땅마저 사랑하고 아프게 뿌리를 내린다. 그리고 견고하게 스스로의 세계를 건축한다. 어쩌면 담쟁이에게 벽은 지독히 사랑해야 할 모순 덩어리 현실일지도 모른다. 그러한 현실의 부조리와 차갑게 마주하며, 담쟁이는 그 벽을 새로운 길로 만들어간다. 그래서 담쟁이는 초록의 희망과 닮았다.

담쟁이를 보면, 많은 것을 가졌음에도 언제나 부족함만을 먼저 생각하는 우리들 일상이 한없이 초라해진다. 우리는 허기와 결핍에 얼마나 참을성 있게 대처했었나. 우리는 모순적 현실을 피하려고만 하지 않았었나.

담쟁이의 또 하나 장점은 더 나은 환경을 부러워하거나 질투하지 않는 데 있다. 그 대신 담쟁이는 환경을 스스로 이용하는 법을 배운다. 물 한 모금 제대로 공급받지 못하는 곳, 담쟁이는 그 갈증을 조급하게 채우려하지 않는다. 물방울이 바위를 뚫듯, 서서히 그러나 꾸준하게 자신을 밀고 나간다. 그리하여 담쟁이는 다른 어떤 나무보다 많은 햇빛의 영역을 확보한다.

또한, 담쟁이는 중간에 쉽게 포기하지 않는다. 장애물을 만나면 그것과 시끄럽게 다투지 않는다. 그 대신 그러한 것과 공존의 방법을 찾는다. 그리하여 담쟁이는 다른 어떤 나무보다 더 높게 하늘로 올라간다. 오를 수 있는 벽만 존재한다면, 그의 도전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절망에 대처하고 절망을 이겨내는 담쟁이의 태도이다. 이것이 결핍에 대처하고 결핍을 극복하는 담쟁이의 자세다. 담쟁이가 그리웠던 막연하기만 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었으리라.

게을러지거나, 쉽게 지치거나 포기하고 싶을 때, 또는 생활이 다소 무미건조해졌다면, 밖으로 나가서 담쟁이를 바라보자. 그러면 작은 위안을 얻게 될지 모른다. 스스로의 부족한 점, 스스로의 결핍, 스스로의 갈증, 스스로의 절망을 사랑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못난 것도 힘이 된다'는 말이 있다. 스스로 감추고 싶은 상황과 모습 속에서도 희망을 발견할지 모를 일이다. 담쟁이를 보고 모순 덩어리 현실이지만 똑바로 응시할 힘을 얻을지 모를 일이다.

담쟁이에게

누군가는/ 메아리 없는 벽을 향해/ 열렬한 고백을 해야 한다.

누군가는/ 한 줌 습기 없는 땅에서도/ 봄을 기다려야 한다.

누군가는/ 면역 없는 외로움과/ 지치도록 싸워야 한다.

모두가/ 비옥한 대지를 꿈꿀 때 / 누군가는/ 차가운 궁핍과 마주해야 한다.

모두가/ 성급하게 철거를 떠올리는/ 그 폐허의 풍경 속에서도

누군가는/ 희망의 문신을 새겨야 한다.

누군가는/ 누군가의 허무를 사랑하고

누군가는/ 누군가의 슬픔을 엮어내고

누군가는/ 누군가의 고독을 위로하여

그리하여/ 누군가의 언어가 되고/ 누군가의 창문이 되고/ 누군가의 계절이 되어

마침내/ 거대한 불모의 벽을 허문다.

(시 '담쟁이에게'. 임헌우, 2012)

담쟁이의 계절이다. 담쟁이를 보며 하늘을 향해 끝없이 번식해가는 그런 모습을 희망해 본다. 담쟁이가 담쟁이다운 것. 그래서 담쟁이가 한없이 고마워질 때가 있다. 그래서 나는 담쟁이가 가끔 그리워진다.

임헌우/계명대학교 교수·시각디자인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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