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춘추] 나는 삼류다

입력 2012-06-06 07:38:57

"대표작이 뭐예요?" 기대에 찬 눈으로 그녀가 묻는다. "뭐 대표작이라기보다 S전자의 W에어컨을 제가 만들었습니다." 기대에 충분히 부응하고도 남는 대답이다. "어머, 그 광고를 감독님이 만드셨어요? 그 광고 자주 봤는데, 감독님 정말 멋있어요." 이래야 이야기가 된다. 그러나 이것은 그냥 상상일 뿐이다. 현실적인 대화로 재구성해보자.

"어머, CF감독이세요? 대표작이 뭐예요?" 여기까진 상상속의 그녀와 똑같이 기대에 차 있다. "들안길의 '꾸버머거 식당'이라는 광곤데, 본 적 있어요?" 이때부터 그녀의 목은 45도 각도로 기울고 눈동자는 위쪽으로 몰린다. 이제 다급한 쪽은 나다. "그러면 시지동의 '감자 없는 감자탕'은?" "아, 그 식당은 가 봤어요. 그 집 감자탕은 우거지가 너무 적어요." 얘기가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흘러간다.

요즘은 누군가 대표작이 뭐냐고 물으면 딱 잘라 없다고 대답한다. 그렇다고 내가 광고를 만들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동안 수백 편을 만들었지만 단지 사람들이 알지도 기억하지도 못할 뿐이다.

대기업의 광고들은 시청률이 높은 황금시간대에 매일 융단폭격을 퍼붓는다. 보고 싶지 않아도 보게 되고 기억하려 하지 않아도 기억된다. 그러한 광고는 또 수억원을 들여 제작을 한다. 속칭 일류 감독이 제작하는 일류 기업의 일류 광고들이다.

"이 감독, 우리 식당은 맛도 좋고 가격도 싸고 산지에서 직송한 신선한 재료에다 지극정성으로 만든다는 걸 꼭 넣어줘. 특히 계모임이나 회식을 위한 150석 규모의 대연회장이 완비되어 있다는 걸 자막으로 크게 쳐줘. 아, 그리고 최상의 서비스라는 것도 빠뜨리지 마." 요구사항이 구구절절이다. "그렇게 해서는 광고가 안 됩니다." 나는 이제 이 말을 밖으로 내뱉지 않는다. 오히려 이해를 한다. 광고료가 싼 심야나 새벽 시간대에 일주일에 1회 정도 노출하다 보니 한 번에 모든 걸 다 말해야만 하는 절박함을 잘 안다. 광고주가 마지막 일격을 가한다. "제작비는 한 이삼백이면 되겠지? 아, 그리고 S전자의 W에어컨 그거 잘 만들었던데, 그렇게 좀 못 만드나?"

20초 안에 모든 요구사항을 쑤셔 넣는 신공을 가진 사람, 엄청난 제작비 차이를 극복하고 S전자 W에어컨에 버금가는 광고를 만들어야만 하는 사람, 나는 지방의 삼류 CF감독이다.

세상은 1%의 일류가 아닌 99%의 삼류가 있어 유지되고 돌아간다. 그래서 99%와 함께하는 삼류의 존재는 일류보다 더 가치 있다. 일류와 삼류는 결코 수직적 차등의 개념이 아니다. 나는 오늘도 세상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삼류를 위한 광고를 만드는 삼류 CF감독으로 살아가고 있다. 

이병동<CF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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