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을 요리하는 의사] 함께 살아가는 법

입력 2012-06-04 07:15:32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가벼움과 무거움이 서로 경계를 불분명하게 하면서 뒤섞여 있다. 사람도 그렇다. 어떤 부분은 내가 그보다 가볍고, 어떤 것은 그가 나보다 무겁게 삶을 생각한다. 그렇게 어울려져서 세상은 보다 좋게 변한다.

그렇지만 '죽음이 다가오는 것'과 같은 결정적인 순간에는 인생의 가벼움과 무거움, 겉과 속이 그 경계선을 남김없이 드러내기도 한다. 그 갈등의 한가운데 서서 주인공이 되거나 방관자가 되면서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운다.

폭풍전야의 고요함일까? 그 날따라 겸연쩍게 웃는 혜숙(53'말기 유방암 환자) 아줌마의 남편을 보니, 엄청나게 평화로워 보였다. 회진갈 때마다, 진한 담배냄새 풀풀 풍기면서 "아내가 떠나면 따라서 같이 갈 것 같다"고 했던 그였다.

그런데 좀 변했다. 텁수룩하게 자란 그의 수염은 어디서 도를 닦고 나온 것 같은 느낌이다. 반짝이는 눈빛 때문일까? 그의 툭 던지는 슬픈 한마디가 어쩐지 편하게조차 들린다. "저, 이제는 다 받아들여요. 며칠 전까지만 해도 툭툭 털고 벌떡 일어나 앉을 것 같았거든요. 그런데 이제는 영 아닌 것 같아요. 받아들여야겠어요. 아내를 위해 성경책을 읽고 있습니다."

속으로 나는 조금은 힘들었던 그동안의 돌봄이 헛수고는 아닌가 보다 하면서 가슴 벅차했다. 남들은 나를 보고 '죽이는 의사'라고도 하지만, '호스피스를 하면 이런 일이 보람있지 않은가?'하며 혼자 흐뭇해했다.

그러나 사건은 그러고 난 그 다음날 터졌다. "아니, 그럼 호스피스병동에서 되는 것은 무엇이고 안 되는 것은 무엇입니까?" "어떻게 삿대질하면서 저한테 말씀할 수 있으세요?" 환자에게 산소 모니터를 설치해달라고 했다가 간호사에게 거절당하자, 그는 순식간에 폭발했다. 사건은 하나였지만 서로가 쌓인 것이 산더미처럼 많아 보였다.

스트레스를 표시하는 항목 중 '최근 배우자 사망'은 그 지수가 100으로 가장 높다. 다음은 '이혼'으로 70이다. 임종 직전을 함께하는 배우자의 스트레스 지수는 아마 모르긴 해도 그 두 배를 훌쩍 넘을 것 같다.

더러는 가벼워 보이던 것, 하찮던 것, 사소한 성격적 결함이 극한 상황에 나도 모르게 드러난다. 누구나 일상생활에서는 괜찮은 사람일지 모른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누구나 만들어 쓰는 가면이 어떤 방패 노릇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가면이 벗겨지는 곳이 호스피스병동이라는 작은 공간이다. 지친 삶에서 그리고 피로해진 마음속에서 옳고 그른 것은 중요하지가 않다. 우리를 힘들게 했던 각자의 가벼움과 무거움이 함께 버무려져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 더 중요하다.

김여환 대구의료원 호스피스'완화의료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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