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대다수의 의과대학이 대학원 과정으로 바뀌어 의학전문대학원이 되었지만 그전까지는 6년제 학부 과정이었고 그 안에 2년간의 의예과란 것이 있었다. 말 그대로 의학이라는 전문과목을 수학하기 위한 예비 과정인데 그중 교양과목에 철학, 문학 등의 인문학이 포진하고 있었다.
예과를 공부 지옥과도 같은 본과에 들어가기 전에 주어지는 휴식기쯤으로 여겼던 철없던 나에게 인문학 시간은 별천지와도 같았다. 교수님들께 엉뚱한 질문도 던지고 더러는 마음 맞는 악동들끼리 수업을 빼먹고 학교 앞 막걸리 집에 있기도 하였다. 인간과 문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차라리 친구들과 술잔을 부딪치는 게 낫다고 촐싹대던 참으로 유치한 시절이었다. 그때는 철학, 문학, 역사 같은 것들이 의학과는 큰 관계가 없고 신입생의 필수과목 중 한 부분에 불과하다고 생각했었던 것 같다.
의사가 치료해야 할 상대는 질병이 아니라 환자라는 것을 알게 되고, 내가 비로소 의학과 인문학의 관계를 몸소 느끼기까지는 그 후 많은 세월이 흘러야 했다. 교과서에 나오는 여러 질병들이 아니라 수많은 환자와 마주치면서 의학은 경험을 기반으로 한 자연과학이라기보다는 인간을 이해하는 인문학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의학은 인문학'이라는 표현이 너무 앞선다면 최소한 의학은 인문학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믿음이 생겼다. 만일 의학이 그저 '경험에만 기반을 둔 과학'이라면 앞으로 인공지능으로 무장한 컴퓨터가 의사를 대신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환자 역시 수십만, 수백만 명의 경험이 기록된 컴퓨터보다 둔한 의사를 만날 이유가 없다.
사실 따지고 보면 인간이 만든 어떠한 학문이든 그 궁극적인 목적은 인간을 위하는 데 있다고 하겠다. 예컨대 동물학, 식물학의 최종 목적이 동물과 식물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보탬이 되고자 하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의학뿐만 아니라 모든 과학의 영역도 인간을 이해하는 것에서 출발하며 그 도착점도 인간에 있다고 볼 수 있다. 과학자의 가장 큰 덕목인 창의력도 상상력에서 기인하고 그 상상력에 날개를 달아주는 것이 바로 인문학이다.
인류가 산업혁명이라는 거대한 물결을 헤쳐 나오면서 요즘은 정보혁명의 시대라고 한다. 그 정보혁명을 이끄는 IT 분야의 가장 선두 주자이면서 전 세계 브랜드 가치 1위를 한 애플의 성공을 이야기할 때 '인간에 대한 이해'를 빠트리고는 도저히 이야기할 수가 없다. 스티브 잡스도 "우리는 항상 기술과 인문학의 교차로에서 고민하고 있다"고 했다.
의학도 질병에 대한 탐구만이 아니라 인간을 이해하는 데까지 더욱 노력을 기울인다면, 그저 빛바랜 장식처럼 붙어 있던 '인술'(仁術)이라는 이름이 새롭게 빛날 것이다.
정호영 경북대병원 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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